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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전봉준과 동학 혁명

입력
2014.06.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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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섭 예술인문학자

내 조국의 역사는 버려져 있다.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교학사의 역사교과서 논란과 온 나라를 어지럽히며 ‘몽망진창’으로 끝난 문창극 사태도 그 결과다. 이번에도 해석의 차이니 오해니 시끄럽다가 문 후보자의 사퇴로 역사관에 대한 논쟁은 사그라질 것이다. 기회다 싶으면 고개를 들이미는 친일매국 세력과 그 후손들의 서슬퍼런 당당함은 개탄스럽다. 반공을 외치며 기사회생한 친일파는 이 나라의 주요 요직들을 차지했고, 역사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 들였다. 친일과 반공의 뒤엉킴 앞에서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많은 한국인들의 정의감과 합리성은 마비돼 버렸다. 단 한 명의 친일부역자도 처벌하지 못한 내 조국에서 무너진 민족 자존심은 일본과의 축구경기에서나 악착같이 세우려 했다.

올해는 동학혁명 120주년이다. 그러나 그 상징과 같은 전봉준의 이름은 낯설다. 녹두장군은 점차 잊혀져 그 이름은 마치 무속신앙의 기호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조선 말의 나라 사정은 참혹했다. 당시의 많은 지방관리들처럼 탐관오리 조병갑에게도 백성은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갖가지 세금과 부역에 치여 백성들은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다. 참고 또 참던 고부 농민들과 함께 전봉준은 1894년 갑오년 1월 10일 기포(起包ㆍ동학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해 고부관아를 습격하면서 동학혁명은 시작됐다. 그들은 관아에 쌓인 수탈 재물을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고 스스로 흩어졌다. 하지만 조정에서 보낸 조사관이 기병에 참여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가족들을 살육하자, 일본군이 왕궁을 공격하고 임금을 놀라게 하자 동학군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맹세한다”는 애국애민의 기치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10만명이 넘는 동학군은 정부군과 연합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항전과 결전을 거듭했으나 끝내 제압당했다.

전봉준은 옛 동료의 밀고로 체포됐다. 다음 해 열린 제1차 재판정에서 법관은 전봉준에게 농민들과 달리 선비로서 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왜 고부관아를 습격했는지 물었다. “일신의 해로 말미암아 기포함이 어찌 남자의 일이 되리요. 중민(衆民)이 억울해하고 한탄하는 고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코자 한 것이다.”

같은 물음에 대해 이틀 후에 열린 2차 공판에서는 “세상일이 날로 옳지 못한 방향으로 되어가므로 개탄해 한번 세상을 구제하자는 의견” 이라고 답했다. 말로써 아름답고, 내용은 정의롭다. 일본 공사가 전봉준 장군의 재질을 아껴 그에게 일본 정부의 양해를 얻어 살 길을 찾아봄이 어떠냐고 회유하자 장군은 “구구한 생명을 위해 활로를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자신을 넘어 세상을 품은 자의 기개가 강건하다. 1895년 음력 3월 29일 전봉준 장군은 동지인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득명과 더불어 교수형으로 죽었다. 당시 41살이었다.(문순태 동학기행 참조)

동학혁명은 한국 근ㆍ현대사의 방향을 결정지은 사건 중 하나다. 처벌받고 청산돼야 할 친일ㆍ매국의 불의는 잘 포장돼 전해지지만, 여전히 동학혁명의 정신과 가치는 버려지고 푸대접을 받고 있다. 애국선열의 후손으로 면목없고, 다음 세대의 선대로서 부끄럽다. 지금도 전봉준의 이름에는 여전히 수많은 백성들의 울분과 핍박의 아우성이 절절하게 들끓고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불의와 부당함에 분노하고 약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그들의 정의감과 연대의식을 잃어버린 듯 하다.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를 겪으며 한국인을 구성하는 정신적 요소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유학했던 프랑스에서 역사는 현재의 사건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특히 68혁명의 정신을 간직한 많은 이들이 프랑스 사회의 우경화를 저지하는 주요 축으로 살아있었다. 역사가 그 나라의 얼굴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들처럼 당당한 한국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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