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철 부국장
잘못은 문창극씨가 아니라 거부감 큰 그를 택한 청와대 '깜짝' 인사 고집 말고, 새 총리는 야당과 교감을 갖도록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장장 7년에 걸쳐 방영된 웨스트 윙(The West Wing)은 미국 방송사상 최고의 정치 드라마로 꼽힌다. 가벼운 에피소드도 아닌 딱딱한 정치물이 시즌7까지 이어졌다는 건 정말로 경이적인 일이다.
웨스트 윙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뉴햄프셔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제프 바틀렛 대통령의 8년 집권기를 그렸다. 물론 픽션이고, 바틀렛도 가상 인물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백악관'을 그린 탓에, 공화당 지지자들은 "웨스트 윙이 아니라 레프트 윙(left wing)"이라고 부를 만큼 이 드라마를 싫어했다는 얘기도 있다.
나는 시즌1~7 전편을 서너 번은 봤을 만큼 이 드라마의 열혈팬이었다. 아직도 많은 장면들이 생생하지만, 지금 특히 떠오르는 건 차기 대통령선거를 다룬 시즌7의 종반부다.
드라마 속 민주당 대선 후보는 히스패닉계 정치신인 매튜 산토스 하원의원. 공화당 후보는 관록의 어니 비닉 상원의원이다. 나이, 정치경력, 인종 등 모든 면에서 상반된 이 대결에서, 유권자들은 산토스 후보를 택한다.
극적인 건 그 다음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 산토스 당선자는 비닉 의원을 사무실로 은밀히 초대한다. 그리곤 "새 정부의 국무장관을 맡아달라"고 말한다. 비록 민주당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대선을 통해 깊어진 갈등을 치유하고 초당적 국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선 라이벌이었던 골수 공화당원에게 내각 최고의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비닉 의원은 이를 '정치 쇼'로 의심하지만 결국 대통합의 명분에 공감, 국무장관직을 받아들인다.
확실히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훈훈한 결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통념을 깨는 대통합 인사는 실제 미국 정치에서 일어났다. 2008년 백악관에 입성한 오바마 대통령은 초대 국무장관으로 힐러리 상원의원을 지명했다. 같은 민주당이긴 하지만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한치 양보 없이 맞붙었던 옛 정적을, 막강하고 화려한 국무장관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물론 정치적 계산이 깔린 선택이었겠지만, 어쨌든 힐러리 카드를 통해 오마바 대통령은 '통 큰' 이미지와 함께 화합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총리후보를 연거푸 잃은 청와대와 여권은 지금 패닉 상태다. 무엇보다 문창극씨를 낙마시킨 '왜곡'된 여론, 그런 여론조작을 만들어낸 일부 언론의 거두절미식 보도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 하지만 문씨의 중도 하차를 '악마의 편집'탓으로만 돌린다면, 이 정치적 참사에서 결국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문씨는 애초부터 야권의 '비토'대상이었다. 그가 총리 후보로 발표되는 순간 야당에선 '무조건 낙마'란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의 강한 보수성향, 그리고 과거 야권을 여러 차례 자극했던 칼럼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건 문씨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자기 소신대로 글을 써왔을 뿐이다. 잘못은 야당이 싫어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문씨가 아니라, 야권이 극도로 거부하는 그를 굳이 총리 자리에 앉히려 했던 청와대에 있다. 세월호 참사 그리고 지방선거를 거치며 어느 때보다 갈등 치유가 절실한 시점에, 그것도 일반 장관도 아닌 가장 통합 이미지가 요구되는 총리직에, 야권이 그토록 싫어하는 인물을 왜 앉히려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저 재산과 병역만 깨끗하면 청문회 고비를 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건 그야말로 좁디 좁은 검증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옛 야권 인사들을 꽤 많이 영입했다. 하지만 정작 집권 후엔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을 한 명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초대 내각도, 이번 2기 내각도 그저 동질적인 인물들로만 채웠다. 아무리 통합을 얘기해도 공허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야당에 추천권을 주라거나, 진보적 인물을 앉혀야 한다는 얘긴 아니다. 최소한 국민의 절반 가량이 싫어할 인사는 피해야 한다. 다른 자리라면 몰라도 총리 만큼은 달랐어야 했다. 굳이 '깜짝' 인선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청문회 통과를 위해 필요하다면 총리 후보를 놓고 야권과 미리 물밑교감을 나눠도 나쁠 것은 없다고 본다.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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