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독자상담코너를 통해 본 1930년대의 윤리의식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 사례 100여판 추려 실어 가정사·애정 문제·가치논쟁 지면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 이태준·김활란·신태악 등 저명인사도 상담자로 나서
갑양과 을양은 동성커플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병군이 끼어들었다. 갑양은 병군과도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을양과 병군이 진짜 커플이었다. 둘이 계획적으로 갑양에게 접근해 그녀의 마음을 홀린 것이었다. 갑양의 돈을 노리고서다. 둘도 없는 동성 연인과 남자친구를 잃게 된 충격에 갑양은 죽고만 싶었다.
드라마가 아니다. 신문에 실린 실제 사연이다. 그것도 1931년이다. 1930년대에도 다양한 연애방식이 있었다는 사실, 이런 사연을 일간지 지면을 통해 익명으로나마 공개적으로 상담했다는 게 경이롭다.
스물 여덟 살 직장여성 유영애씨의 사정은 또 어떤가. 이미 결혼했음에도 그녀는 연하의 회사 동료와 몸으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안 그래도 남편과의 성관계에서 불만을 느끼던 터였다. 유씨는 일시적인 탈선이 아니란 믿음에 고민이 깊었다. 그녀는 호소한다. “그 남자를 도저히 잊을 수 없고 그 남자도 죽을 둥 살 둥 나를 잊지 못합니다.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습니까.”
근대문화 연구자인 전봉관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교수가 낸 ‘경성 고민상담소’(민음사)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전 교수는 1930년대에 발행된 조선일보의 독자문답 코너 ‘어찌하리까’와 조선중앙일보(1937년 폐간)의 같은 꼭지 ‘명암의 십자로’ 500여 편을 훑어 그 중 100여 편을 추려 실었다. 당시만 해도 신문엔 ‘가정’면이 있었고 여러 신문들이 이를 통해 가정문제나 애정사, 법률상식 등을 상담했다. ‘사생활의 역사’가 관심인 인문학자에게 개인의 고민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있는 독자문답란은 좋은 연구 주제였다.
상담자로는 익명의 기자들이 나섰지만 때로 소설가 이태준, 변호사 신태악, 성신여학교의 설립자인 이숙종이 등장했다. 전 교수는 적나라한 사연보다도 상당자의 의견에 더 눈길이 갔다. 전 교수는 “답변에는 그 시대의 보편적 상식과 윤리의 통념이 담겨있기 때문에 학술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근대와 전(前)근대가 혼재하던 1930년대의 ‘보편적인 상식’이란 게 지금 보아도 충격적이다. 1933년 10월 15일자 ‘어찌하리까’에 실린 26세 남성의 사연을 보자. 제목은 ‘간통한 처를 어찌하리까’인데 읽어보면 아내가 집에 무단 침입한 낯선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이 남자는 “여자(처)는 강력히 거절하다 힘이 부쳐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당했다고 하지만 저는 간통한 여자와 살 수 없으니 간부와 동거하라고 말했다”고 썼다. 사연만 보면 남편은 영혼을 살해 당한 아내를 치유하고 범인을 잡지는 못할 망정 ‘2차 가해’까지 한 셈이다.
변호사 신태악이 답변이랍시고 내놓은 조언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것은 법률상으로나 도덕상으로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처가 잘못을 후회하니 모두 용서하는 게 남자의 도리”라고 충고한다. 상담을 구한 남성이나 해법을 내놓는 변호사나 간통과 강간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니 지금으로선 답답하기 그지 없다. 전 교수는 “이들의 납득할 수 없는 태도는 무지 탓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풀이했다.
때로 ‘가치 논쟁’도 벌어졌다. 딸만 둘 있는 25세 남성이 아내가 자궁 질환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다시 결혼해 자식을 낳는 게 좋겠느냐며 물어온 사연에 대해서다. 편집자는 답변을 당시 이화여전 부교장이었던 김활란과 여성의사 길정희에게 의뢰해 공론의 장을 펼쳤다. “사상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조선에서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라는 설명과 함께다. 상담자로 나선 두 여성이 남녀차별과 남아선호에 강하게 반대하는 글을 썼음은 물론이다.
책에는 이밖에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사례를 ▦조혼이라는 감옥 ▦제2부인의 탄생 ▦바람난 가족 ▦여성 수난사 ▦과도기의 성 ▦금지된 사랑이란 6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성인이 된 ‘꼬마신랑’의 외도나 남편의 아내 학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결혼한 여성, 혼전 성관계 후 돌변한 남성 등 성적 방종으로 보일 수 있는 사례의 연속이다.
책을 통해 전 교수는 ‘요즘 것들은 문란해’라는 통념의 허구,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신화에 도발한다. 저자는 “흔히 과거가 현재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절제돼있으리라고 믿지만 자유와 인권 등 인류 보편의 윤리가 확립된 시기는 조선 시대가 아닌 바로 지금”이라며 “지금 세대가 훨씬 더 안정적이고 건전한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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