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시계 세대는 가고….
새벽 05시02분, 그날 정동진에는 해가 뜨지 않았다. 밤을 새운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백사장까지 마중 나갔지만 끝내 일출은 볼 수 없었다. 새벽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승객을 내리고 어김없이 제 길을 떠났다. 대신 바다에서 밀려왔는지 산에서 불어왔는지 모를 안개가 해변을 감싸며 아쉬움을 위로해 주었다.
드라마 모래시계 열풍으로 시작해 해돋이 명소 1번지로 대접받던 정동진은 이제 잊을 때가 되었다. 풋내기 대학생과 피 끓는 청년이었던 고현정과 최민수는 어느덧 완숙한 중년 연기자가 되었고, 그 무렵 태어난 젊은이들이 20년 전과는 다른 고민으로 바다를 찾고,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언어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사이 호젓한 해변마을이었던 정동진엔 우후죽순처럼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늘어났다. 유행처럼 관광객이 몰리고 빠져나간 자리에는 난개발의 찌꺼기만 남고, 정동진은 점점 더 매력을 잃은 채 그저 그런 관광지로 이름만 남기고 있었다. 아직 500원짜리 입장권으로 정동진역에 들어오는 관광객이 승차인원보다 많다지만 한해 200만 명(2002년)에 이르던 방문객은 작년 50만 명으로 줄었다. 내국인이 빠져나간 자리는 양양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채워지고 있다.
정동진에 새로운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생겨난 것은, 모래시계와 일출의 기억이 지겨워질 바로 그 즈음이다.
과학과 예술 철학을 이야기하는 정동진 시간박물관
고현정 소나무, 국적을 알 수 없는 초대형 모래시계 외에는 이렇다 할 이야기 거리가 없던 정동진에 시간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지난해 7월이다.
시간박물관은 단순히 시계를 전시한 공간이 아니다. 과학관은 모두에게 익숙한 물시계 해시계에서 시작해 연소시계 분동시계 진자시계 크로노미터 수정시계 원자시계 등 시계와 시간의 발전사를 차례로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일정 구간’을 나타내던 시간은 이제 마이크로초까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오차를 줄여온 시계의 역사는 3만 년에 1초만 틀린다는 세슘원자 시계로까지 발전했다. 중세관에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을 형상화한 무게 70kg의 대리석시계와 200년 전 처음으로 초침을 장착한 중국의 국보급 남경시계 등 동서양의 진귀한 시계가 다양하게 전시됐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았다는 회중시계도 눈길을 끈다.
현대관은 시간을 매개로 과학과 예술 철학이 만나는 공간이다. 현대 예술작가들이 국제대회에서 수상한 다양한 시계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자전거 기어로 정확히 시간을 맞춘 작품이나, 구슬이 일정구간을 오가며 시간을 측정하는 작품은 시간과 시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선다.
그랜드파더 세븐맨 클락(Grandfather 7man Clock)이라는 철학시계는 관람객들에게 시간의 노예로 살 것인지 주인으로 살 것인지 직접적으로 묻는다. 이름대로 일곱 청동인형이 열심히 시계를 작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시간의 톱니바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울한 시계’이기도 하고, ‘역동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간을 개척해가는 활기찬 시계’가 되기도 한다. 추에 매달려 천천히 위로 올라가다가 한 순간에 추락하는 제7의 인물은 인생의 굴곡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의 원숙기에 접어든 은퇴자들이 특히 주목하는 작품이란다. 미국 조각가 고든 브랏(Gorden Bradt)의 작품으로 전 세계에 24점이 있다. 전시된 시계 대부분이 작품이면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73년 동안 살면서 추억의 멋을 알았다” “시간은 누군가와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늘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며 빛나는 청춘을 보내야지” “스물 두 살, 내가 가진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열차 8량 180m 공간, 짧은 시간여행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서며 적은 쪽지엔 각자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소회가 묻어있다.
자연과 예술의 조화를 꿈꾸는 하슬라아트월드
“산짐승의 길을 따라 만든 이 산책로에는 100개의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소나무정원의 탐방로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간의 정원에 세운 해시계는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통로다. 막 바다에서 나온 듯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며 언덕을 오르는 곳은 바다정원이다. 호텔건물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발 딛고 선 동상의 정체는 하늘정원에서 확실해진다. 검푸른 동해바다에서 막 솟아오르는 ‘포세이돈의 귀환’이다.
하슬라아트월드는 동해바다와 괘방산 자락 3만3천평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풀숲을 기어 나오는 듯한 청동곤충, 작품인지 실제인지 헷갈리는 새집, 거꾸로 처박힌 돼지, 돌로 만든 눈 없는 물고기 등 산책로 곳곳에 산재한 작품은 때로는 3차원이 되어 숲에 안기고, 때로는 2차원이 되어 바다에 닿는다. 자연을 거스르는 엉뚱한 거부감이 없다. ‘만지지 마시오’나 ‘접근금지’등 예술과 관객을 분리시키는 흔한 경고문도 없다. 사람이 만든 또 하나의 풍경처럼 친근하다. 대부분 작품에는 제목도 설명도 없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름을 붙이는 재미를 더한다. 박신정 대표는 예술공원 자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봐주길 원해서라며 “개인적으로는 공부와 해석에 대한 염증도 한몫 했다”고 밝혔다.
2003년 문을 연 하슬라아트월드는 아직 진행형이다. 바다정원 맞은편 언덕에 파헤쳐진 공사로가 눈에 거슬린다. 이 미술관이 지향하는 ‘인위적인 가공보다는 자연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인간·예술·환경이 공존하는 공원’이라는 애초 목적이 훼손되지 않기를…
경쾌하게 혀를 굴리듯 발음하는 하슬라(何瑟羅)는 미천왕 14년(313년) 강릉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가볍게 산책하듯 예술공원을 빠져 나오면 예전의 그 정동진 앞바다와 다시 마주친다. 이때쯤이면 여행은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가 생겼다 사라지고, 더러는 켜켜이 쌓인 오래된 시간의 이동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다.
강릉=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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