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차가운 계곡물에 발 담그고 싶다면 성수기 피해 지금 떠난다. 강원도 말고 어디 없을까 싶을 때 충북 제천 뒤적거려 본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데다 풍경까지 멋진 곳이 몇 군데 있다. 이 가운데 탁사정계곡과 송계계곡을 메모해둔다. 지나치게 깊지 않은데다 텐트 칠 곳도 적당히 있는 계곡들이다. 이들 계곡에서는 고즈넉하게 산책할 수 있는 장소도 멀지 않다. 계곡은 바다의 장쾌함과 다른 예스러운 풍류를 만끽할 수 있어 끌린다.
○ 탁사정과 배론성지
탁사정은 제천 땅 북쪽 봉양읍에 있다. 구학천이 흐르는 강변 바위 언덕에 지어진 정면 두 칸짜리 소박한 정자가 탁사정인데, 제천 사람들은 이 정자 주변의 계곡 일대를 통틀어 탁사정이라고 부른다. 전국적 명성은 덜해도 제천 사람들에겐 제법 이름난 피서지다.
강변 옆 절벽 위의 정자, 그 아래를 ‘S’자로 굽어 흐르는 강물과 흔히 볼 수 있는 백사장… 들머리 도로나 주차장에서 본 풍경은 밋밋하지만, 그렇다고 딴 데로 방향 틀면 실수하는 거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차장 옆 야트막한 언덕 하나 넘어가면 눈이 놀랄 풍경이 ‘짠’하고 펼쳐진다. 정자가 있는 언덕의 반대편이다. 하얗고 기이하게 생긴 큰 바위들이 짙푸른 계류 군데군데 처박혀 있는 모습이 어찌나 천연한지 맞닥뜨리면 입이 쩍 벌어진다. 특징 없이 평범한 풍경 뒤에 선계(仙界)가 꼭꼭 숨어있었다. 탁사정이 왜 제천 10경에 끼는지(9경) 고개 절로 끄덕이게 된다. 이러니 정자만 보고 간 사람은 탁사정 안 본거다.
백사장 거닐고 바위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탁족도 즐긴다. 발이 물에 닿는 순간 찜통 같은 더위 잊히고 먹먹한 가슴도 덩달아 뻥 뚫릴 거다. 성수기 피해 지금 가면 분위기 호젓하다. 비가 적당히 온 후라면 물은 더 맑고 차며 양도 더 많을 거다. 계곡 위로 가서 모퉁이 돌면 가물가물하게 중앙선 열차가 지나는 철교. 맑은 물에 발 담그고 열차 지나가는 것도 구경한다. 잊고 지낸 어릴 때 동경이 ‘덜컹덜컹’하는 소리에 맞춰 시나브로 되살아 날 거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힐링’이 별거 일까 싶다.
이왕 왔으니 정자까지는 가 본다. 들머리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는다. 조선 선조 때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이 일대에 심고 정자를 지어 팔송정이라 했다. 시간 흘러 허물어진 정자를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탁사정이라 이름 붙였다. 이 이름은 중국 초나라 사람인 굴원이 지은 ‘어부사’에 나오는 시에서 따왔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는 의미의 글귀를 줄인 것인데 속세의 때를 씻고 자연처럼 소박하게 살자는 뜻이란다. 정자에서 보는 풍경은 아래서 보는 그것과 딴판이다. 6월의 녹음과 계곡물이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계곡에선 맑은 물에 발을 적시고 정자에선 무구한 바람에 마음을 적신다. 이게 제대로 된 피서다. 몸 말고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
탁사정에서 배론성지가 가깝다. 같은 봉양읍에 있다. 신유박해(1801)때 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천주교 신자들의 은둔지다. 일대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을 닮아 주론(舟論)으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배론’으로 바뀌었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순교자들의 죽음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 유명한 ‘백서’를 쓴 곳도, 1855년 한국 천주교의 첫 신학교(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도 다 여기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묘도 여기 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다는 토굴과 옛 모습대로 재현한 신학교 등이 잘 복원 돼 있다. 백서의 복사본이 토굴에 전시 중인데 하얀 천 조각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에선 그의 열정과 절박함이 교차한다. 정원과 잔디밭도 예쁘게 꾸며져 있다. 이러니 일대는 ‘성지’라기 보다 잘 가꿔진 공원 같다. ‘성지’라고 해서 거부감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해외여행 가서, 각자의 종교와 무관하게 이름난 성당이나 사찰들 애써 찾아가는 경우 많다. 딱 그 수준으로만 접근하면 된다. 종교마다 전하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는 매한가지다.
숲속으로 난 ‘십자가의 길’은 꼭 걸어본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묵상하는 길이다. 성당마다 다 있는데, 이곳 십자가의 길은 뒷산, 숲속을 지나도록 만들어졌다. 나무 사이사이 들어앉아, 빛 받아 반짝이는 조형물들이 멋진 예술작품 못지않은 감동을 안겨준다. 지난 삶 돌아보게 만드는, 돈 주고도 못살 ‘명작’이다. 이렇게 멋진 야외 갤러리가 있을까 싶다. 바람에 나뭇잎 쓸리는 소리도 맑고 새소리도 깨끗하다. 최양업 신부의 묘가 이 길 중간에 있다. 하나 덧붙이면, 프란시스코 교황이 오는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한다.
○ 송계계곡과 덕주사마애불
제천 땅 남쪽 송계계곡은 전국적으로 이름났다. 그 유명한 월악산(1,097m)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다. 산 깊고 경승 많은 월악산이야 더 이상 설명 필요 없는 명산. 제천, 충주, 단양에 걸쳐있는 이 산, 골 깊으니 계곡 좋은 것은 당연지사다.
월악산에서 제천 쪽 유명한 계곡이 한수면 송계계곡과 덕산면 용하구곡(계곡). 용하구곡은 계곡 출입금지 구간이 많은 반면 송계계곡은 야영장(송계야영장, 닷돈재야영장, 덕주야영장 등)이 세 개나 돼 물놀이 즐길 곳이 상대적으로 많다. 닷돈재야영장에는 풀 옵션 야영장도 있다. 텐트, 침낭, 취사도구 등 캠핑에 필요한 일체를 빌려준다. 몸만 떠나는 캠핑, 해보면 정말 편하다. 이러니 제천 와서 유명한 계곡 가겠다면 송계계곡 기억해 둔다. 각 야영장 주변마다 소나무 참 많다. 녹음 짙어질수록 솔향기는 더 진해질 거다. 더위에 마음 급한 사람들, 벌써 물속에 들어가 물장구다. 보고만 있어도 시원한 풍경. 풍경은 눈이 좇는데 호강은 몸이 한다.
계곡 옆으로 도로가 함께 달린다. 야영장 벗어나 도로 따라 가면 와룡대, 팔랑소 같은 경승이 나타난다. 이를 포함한 여덟 경승지가 ‘송계8경’이라 이름 붙었다. 이 가운데 와룡대는 꼭 본다. 찾기도 쉽고 구경하기도 편하다. 와룡교 부근 주차장에 차 세우고 데크에 서면 제대로 볼 수 있다. ‘용이 누워있는 곳’쯤으로 풀이되는 큰 소다.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해 ‘용소’라고도 하는데, 웅장한 바위와 맑고 깊은 소가 압권이다.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마음까지 꽁꽁 얼어버릴지도 모른다. 물에 안 들어가도 시원하다.
짧은 산행 곁들이면 물놀이의 즐거움이 더 크다. 월악산 등산이 부담되면 덕주사마애여래입상만 알현한다. 바위에 새긴 고려 때의 불상이다. 차로 가면 송계계곡에서 덕주사가 가깝고 여기서 영봉 방향 등산로 따라 1.6km 산을 오르면 이 불상 만날 수 있다. 산길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면 큰 바위에 새긴 독특한 부처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높이가 16m나 되는 거불이다.
불상 새긴 사람은 덕주공주로 전한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누이다.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와 금강산으로 향한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창건하고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새겼다. 이곳에서 지척인 충주 하늘재 들머리 미륵리사지(전북 익산 미륵사지와 다르다)에는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불상(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오랜 시간 흘렀어도 얼굴에 터럭만치 이끼도 끼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높이가 10m에 달하는 그 불상 맞다. 이 불상은 여느 불상과 달리 덕주사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남매의 애틋함이 영겁의 시간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큰 바위로 남았다. 덕주사에서 미륵리사지가 멀지 않다.
○ 여행메모
탁사정은 중앙고속도로 신림IC로 나오면 가깝다. 송계계곡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에서 가깝다. 탁사정에서 배론성지까지 차로 약 15분 거리, 송계계곡에서 덕주사까지도 차로 약 15분 거리다. 탁사정에서 송계계곡까지는 차로 약 1시간 거리다.
국도나 지방도를 따라 두 구간을 오가면 그 유명한 청풍호를 지나니 여름날 멋진 호반 드라이브까지 할 수 있다.
봉양읍에서는 장평리에 위치한 산아래(043-646-3233) 쌈밥집이 유명하다. 탁사정계곡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 유기농으로 직접 재배한 채소를 이용하고 밑반찬도 정갈하다. 우렁쌈밥이 인기다. 청풍호 주변에서는 황금가든(043-647-6300)이 울금(강황)을 넣은 떡갈비로 유명하다. 고기를 부드럽게 다졌고 여느 떡갈비에 비해 달지 않다. 교리가든(043-648-0077)은 잡어메운탕과 곤드레밥이 맛있다.
송계계곡의 계곡이나 야영장 이용 관련 문의는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043-653-3250)로 하면 된다.
제천=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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