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小史]
제142회 - 6월 넷째 주
1966년 6월 25일 저녁, 거리는 한산했지만 서울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뜨거웠다. 귀빈실 출입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에 들어섰고 잠시 후 검은 구두에 흰 팬츠를 입은 다부진 몸매의 사내가 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은 한국의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불러들여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타이틀 매치를 벌인 날이었다. 8천여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링에 오른 김기수는 6년 전 로마올림픽 패배를 떠올리며 설욕의 의지를 다졌다.
“땡!” 경기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마자 챔피언의 왼손 훅에 안면을 강타당한 김기수는 휘청거리며 로프를 부여잡았다. 위기였다. 별이 번쩍했지만 간신히 1회전을 넘겼다. 이후 서로 치고 빠지는 지루한 탐색전이 계속됐다. 중반을 넘기자 초조해진 벤베누티가 큰 동작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김기수는 거리를 유지한 채 복부를 가격하며 착실하게 점수를 쌓아갔다. 13회, 로프 고리가 떨어지는 돌발사고로 인한 휴식도 체력이 떨어진 김기수에게는 행운이었다.
마침내 15회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고 3명의 심판은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댄 후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경기장과 거리의 시선은 온통 주심의 손에 쏠렸다. 침묵을 깨고 2-1 판정승 결과가 발표되자 링에 오른 주심은 김기수의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한국 프로복싱 역사상 첫 세계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6주년, 아픔을 털어버릴 만큼 기쁨은 더했다.
완벽한 승리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홈 그라운드의 이점과 약간의 텃세를감안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국민소득 200달러 시대에 거금 5만 5,000달러를 지불하고 한국으로 불러들인 모험이었다.
신문은 앞다퉈 호외를 냈고 김기수는 단번에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튿날 시내 곳곳에서 카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박노식, 김지미와 함께‘내 주먹을 사라’는 제목의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4전5기’의 신화를 쓰게 된 홍수환도 이 경기를 지켜본 후 권투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챔피언벨트는 오래가지 못했다. 2년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산드로 마징기와 벌인 3차 방어전에서 1-2로 판정패 했으니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듬해, 미들급 동양타이틀을 반납하고 링에서 은퇴한 김기수는 이후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다가 97년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한동안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하며 화려하게 비상했던 한국복싱도 이제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그의 챔피언 소식은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값진 선물이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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