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신문기사 틀 중에는 왜 시작됐는지도 모른 채 답습되는 것이 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됐지만 검찰 정기인사가 있으면 검사장급 승진자와 주요 보직자들을 분석하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검사장들의 출신지, 출신고교, 대학, 사법연수원 기수로 채워지는 표도 함께 들어간다. ‘차관급 이상(검사장도 해당)은 프로필을 쓴다’는 기준이 있지만, 그 기준에 비해서도 과한 지면할애에는 설명이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권력기관의 중심이 됐으니 어서어서 연줄을 동원 하시요”라는 일종의 ‘공고’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표는 연줄을 동원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만큼 단순했다.
10여 년 전 법조출입 초년시절, 검사장 프로필 표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대학이 개인의 능력과 성취로 여겨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보자면, 대학까지 가는 고교 목록은 ‘경기고-경기고-서울고-경북고-광주일고’등 몇 개 고교뿐이었으니까. 평준화 세대 출신인 내게 이 넓은 세계가 몇 개 고교로 축소돼 있는 모습이 이상했던 듯싶다.
이제 나도 달라지긴 했다. 법원ㆍ검찰 인사에서 다 큰 어른들이 자못 진지하게 출신고교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인사안배의 고려 대상으로 삼는 현실을 당연시 하며, 그 시스템에 예속돼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현재의 나보다 더 옳다고 믿는다.
19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이 개시, 확대된 영향으로 이제 검사장들의 출신고교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중학교 때 성적 즉, 출신고교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며, 공직사회에서 하나의 쓸데없는 기준이 그리고 그에 따른 연줄과 세력이 사라져가는 것이 내심 기쁘다.
하지만 몇 십 년이 지나면 주요공직자들의 이력은 다시 몇 개 고교로 축소될게 뻔하다. 이미 지난해 기준 대원외고 출신 현직 판ㆍ검사는 129명으로 경기고(55명)를 압도했다. 미래 고위 공직자들의 프로필 표가 ‘외고-외고-외고-자사고-자사고’로 이어질 것을 상상하니 숨이 막힌다. 그 표가‘경기고-경기고-서울고’로 이어지는 표보다 더 걱정스러운 이유는 계급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과거 비평준화 시대의 공교육은 최소한 집안 사정으로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재 외국어고와 자율형사립고의 학비는 일반고보다 약 3~8배 비싸다. 웬만한 대학 등록금과 같다.
공교육 제도가 ‘(대학 가는데 더 유리한) 좋은 고교 입학은 집안에 돈 좀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이 노골적인 ‘커밍아웃’은 개인적으로 상당한 충격이었다.
물론 평준화 제도와 비평준화 제도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교육감들의 압승 이후, 사실상의 비평준화 정책인 자사고(나아가 외고) 문제가 논쟁의 장에 올랐고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다만 이번에는 평준화 논쟁이 과거 10여 년 전 ‘평준화 세대 대학 1학년은 이런 수학문제도 못 풀더라’라는 식의 수준 낮은 형태로 흐르지 않길 바란다. 평준화 세대들이 사회생활에서의 능력과 창의력 발휘에서 비평준화 세대보다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내놓은 연구는 본적이 없다.
무엇보다 평준화든, 비평준화든 공교육을 집안사정으로 차별하는 제도부터 하루빨리 재검토했으면 한다. 예전에 길을 가다 다정하지만 어딘지 남루해 보이던 부부가 “우리 아들이 불쌍해”(아내), “왜?”(남편), “우리 같은 부모를 만나서…”(아내)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가 과외금지에 위헌을 내리고 사교육의 고삐를 완전히 풀어줬을 때, 유일하게 합헌 의견을 냈던 이영모 재판관은 결정문 말미에 “이번 결정은 수많은 학부모와 자녀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안타까움과 위축감을 느끼고 허탈감과 좌절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며 “이 결정이 어린 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닌지, 혼자만의 기우이자 노파심이기를 바랄 뿐이다”고 맺었다. 이 전 재판관의 걱정에 더해, 지금 아이들은 사교육뿐 아니라 공교육에서도 그것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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