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패의 원인은 오직 한가지, 전술의 부재 상대에 대한 무지가 헛된 기대로 내몰아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때만 해도 경기 전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는 시간이 최소 3시간 전이었다. 독일 월드컵 때부터 진행 규정을 바뀌었다. 경기 시작 90분 전까지 물을 뿌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그 시간이 훨씬 단축된 듯하다. 경기 휘슬이 울리기 20여 분을 남기고 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와중에도 스프링클러가 돌아갔다. 한번 태클을 하면 허벅지가 쓰라릴 정도로 건조한 잔디라서 경기 직전까지 물을 뿌렸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잔디는 섬세한 터치를 방해했고 공인구 브라주카는 예측보다 더 빨리 굴렀다. 우리 선수들은 전반 초반에 제대로 된 터치와 패스를 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는 답답한 터에 내뱉는 푸념이다. 알제리 선수들도 똑같은 잔디 위에서 뛰었다. 후반전에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고 박주영 선수가 부담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쓰라린 패배에 따른 정신 보상책일 뿐이다. 사태의 핵심은 오직 한가지, 전술의 부재다. “전술 선택을 잘못한 내 실수다.” 홍명보 감독조차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러시아전 때의 베스트 11이 그대로 나섰는데 알제리는 무려 5명이나 바뀌었다. 4-1-4-1 포메이션에서 수비 대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최전방 공격수 1명과 공격형 미드필더 4명을 새로 투입한 것이다. 우리를 어떻게 공략할지 준비해서 나왔다는 얘기다. 벨기에와 맞붙었을 때와 달리 새 진용을 갖춘 알제리는 초반부터 거센 폭풍을 일으켰다. 중원의 몸싸움이나 공 다툼에서 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럴 때 그라운드 안의 감독이 필요하다. 일단 심판의 경기 개시 휘슬이 울리면 감독의 작전 지시가 일일이 작동하기 어렵다. 수시로 상황이 바뀐다. 그라운드에서 일순간에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하다.
한ㆍ일 월드컵 첫 경기 때,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가 어떤 진용으로 나올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중앙 수비를 책임졌던 홍명보 선수에게 경기 시작 2분 안에 수비라인을 단독으로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홍명보는 최진철, 김태영과 함께 쓰리 백을 구사했다. 지금 홍명보 감독 밑에는 과거의 홍명보 선수 같은 그라운드의 감독이 부재하다. 지난 5월 8일,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홍감독은 곽태휘 선수를 거론하며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맡을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33세의 곽태휘는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 기나긴 전지훈련 과정에서는 큰 역할을 했겠지만 정작 그라운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선수는 없었다.
경기 외적인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지난 해 말, 조 추첨이 끝난 뒤로 지금까지 미디어는 한결같이 알제리를 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방송사 중계진은 알제리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아프리카 팀은 조직력이 없고 자중지란에 곧잘 빠진다고 했다. ‘아프리카 팀’이라는 말이 모든 분석의 근거였다. 얼마나 무서운 편견인가. 알제리 자체에 대한 정보도 빈약했다. 알제리 공격의 구심점인 페굴리를 비롯하여 벤탈렙, 브라히미, 굴람 등 주요 선수들이 프랑스에 태어나 체계적인 유소년 과정을 거쳐 유럽 상위 리그에 활약함은 물론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까지 뛰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오만과 편견, 알제리 선수들에 대한 빈약한 정보가 우리 모두를 헛된 기대로 내몰았고 이내 참담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축구와 월드컵이 예능감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복잡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적 요소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참담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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