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초 신군부는 이른바 3S(섹스, 스크린, 스포츠)정책을 추진했다. 국민의 관심을 성과 오락으로 돌려 비판 의식을 마비시키려는 책략이다. 컬러TV의 등장, 프로야구와 프로씨름 등 프로스포츠의 출범, 성매매 업소의 만개와 포르노테이프의 광범위한 유통, 에로영화의 호황 등이 이 맥락에서 나왔다.
미디어아트 작가 양아치(44)가 서울 소격동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20일 시작한 개인전 제목은 1985년 개봉된 국산 에로영화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양아치의 뼈와 살이 타는 밤이라니, 야한 상상을 하거나 B급 풍자 쇼를 기대할 만하지만 아니다. 무겁고 우울한 작품들을 내놨다. 작가는 뼈와 살을 녹일 듯한 쾌락이 아니라, 타는 듯한 괴로움을 견뎌야 하는 밤의 어둠을 이야기한다.

30년 전 영화를 제목으로 불러낸 데는 한국 사회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시각적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여전히 병든 사회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통제, 높은 자살율과 스트레스…대한민국 전체가 우울증에 걸려 곤란한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지나간 줄 알았던 것이 되돌아오고, 죽은 줄 알았던 것이 살아나고, 살아 있어야 할 것이 죽어나가니,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 나온 줄 알았는데, 더 큰 동굴에 갇힌 것 같다.”
작가가 5년 만에 하는 이번 개인전은 44점의 입체와 사진, 영상작품을 선보인다. 빛과 어둠, 현실과 허구의 상반된 주제를 다룬 신작으로 ‘황금산’과 ‘뼈와 살이 타는 밤’ 연작을 전시 중이다.
‘뼈와 살이 타는 밤’은 어둠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약 6개월 동안 캄캄한 새벽에 인왕산을 오르내리면서 찍은 사진과 영상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과 물체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잡초가 무성한 덤불에 웅크린 게 동물인지 털뭉치인지 분명하지 않다. 허공에 뜬 허연 발바닥이 물구나무 선 남자임을 알려면 한참 걸린다. 오밤중 인적 없는 산에서 마주치면 무섭게 느껴질 장면들이 어둠 속에 겨우 존재하는 모습이 기이하고 서글프다. 영상작품에서 남자는 손전등을 든 채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어두운 미로에서 나왔다 싶은 순간, 영상이 되감기면서 남자는 도로 동굴에 갇힌다. 작가는 어둠으로 대변되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의 반복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금산’은 욕망에 대한 은유다. 번쩍이는 금박지를 붙여서 황금산이 된 강화스티로폼 덩어리는 뻔뻔해서 초라하다. 창백한 금발의 긴 가발을 씌운 기둥들도 황금산이다. 탁자 위에 조명과 장난감, 돌멩이, 유리잔, 박제된 새 등 잡다한 오브제로 구성한 또다른 황금산은 예뻐 보여서 오히려 안쓰럽다. 탁자를 건드리면 노래하는 장난감 새의 새 소리를 박제된 새가 듣는 풍경이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양아치는 2010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받은 주목받는 작가다. 2008, 2009년 세 차례 개인전으로 선보인 ‘미들코리아’ 작업에서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가상의 공간 미들코리아에서 기존 시스템을 파괴하는 저격수 이야기로 우리 사회를 비판했다.
양아치라는 이름은 14, 15년 전 국민PC가 보급되던 시절부터 쓴 아이디다. 작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청년이라는 뜻이고 특별한 의도는 없다”면서 “역사적 사명을 띠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7월 29일까지 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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