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독일의 경제적 피폐함과 극복의 과정
'1954년 월드컵 우승' 속 감동 사연으로 녹여
한국의 첫 출전-푸스카스 활약 찾는 재미도
1954년 독일(서독) 축구는 기적을 일군다. 세계 최강 헝가리를 누르고 월드컵 정상을 첫 차지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전범이라는 굴레와 경제적 피폐함까지 떠안아야 했던 독일 국민에겐 역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거대 사건이었다. 독일영화 ‘베른의 기적’ 은 독일 축구의 이 역사적 순간을 한 가족의 재회와 맞물려서 감동을 전한다. 영화적 완성도는 아주 빼어나다 할 수 없으나 1956년 월드컵 안팎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축구강국에서 만들어진 축구 영화답게 경기장면이 꽤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점도 눈에 띈다. 전후 경제 부흥에 성공하고 다시 세계사의 주역으로 나선 독일의 저력을 살필 수도 있다.
독일 서부 도시 에센이 주요 배경이다. 13세 소년 마테스는 또래들처럼 축구에 빠져있다. 마테스는 지역 축구클럽의 공격수 란을 아버지처럼 따른다. 자신이 경기를 직접 지켜봐야 란이 골을 넣는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마테스의 가족은 전후 여느 독일 가정처럼 불우하다. 전장에 끌려간 아버지는 소련에 포로로 잡혀있다고 하나 생사가 불투명하다. 어머니는 선술집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 형은 밴드와 공산주의에 정신이 쏠려있고 누나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면서도 선술집 운영에 힘을 보탠다. 조금만 흔들리면 금세 쓰러질 듯한 마테스의 가족은 그래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간신히 희망을 이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랜 포로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장의 귀환에 따른 설렘도 잠시, 가족은 폭풍 속으로 진입한다.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10년 넘게 못다 한 가장 역할을 위해 단호하고 폭력적인 언사로 자녀들을 대한다. 눈물 많은 마테스에게 독일소년은 울지 않는다고 다그치고, 마테스가 자기 대신 란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땐 질투심을 폭발시킨다. 그럴수록 마테스는 축구에 몰입하고 아버지와 접점을 찾지 못한다.
마테스의 영웅 란도 독일 축구대표팀에 선발돼 스위스로 향하나 힘든 시간을 보낸다. 속 모를 감독은 자신을 계속 벤치에만 앉혀 두고 있으니 속이 끓는다. 독일은 예선라운드에서 헝가리에 대패를 했음에도 선전을 거듭해 결승전에 진출한다. 헝가리와의 재대결을 앞두고 선수들과 독일 국민들은 긴장하고 기대한다. 마테스의 아버지는 마테스와의 화해를 위해 차를 빌려 결승전이 열리는 베른으로 향한다.
스위스 월드컵의 결과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익히 알려진 독일의 우승에 집중하기보다 우승 이면에 가려진 사연에 집중한다. 마테스가 사는 에센은 루르공업지대에 위치한 독일의 유명 탄광도시다. 영화 속 장면 곳곳에도 검은 탄의 흔적들이 비친다. 스위스의 깔끔한 자연 환경과 달리 검은 떼가 낀 집들과 공터에 쌓인 검은 흙들이 빈한한 탄광도시의 행색을 상징한다. 나아가 에센은 패전으로 일어서기 힘든 지경까지 주저앉은 독일 경제를 대변하면서도 독일 경제의 부흥을 암시한다. 에센은 라인강의 지류인 루르강변에 있다. 루르공업지대는 탄광지대에서 나온 석탄을 에너지로 삼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는 원동력이 됐다. 다른 지역도 아닌 에센의 소년과 그 가족을 스크린 중심에 세운 이유일 것이다.
영화 속에선 축구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 스치듯 지나간다. 월드컵에 첫 출전했다가 헝가리와 터키의 골세례에 무너진 한국 대표팀이 언급된다. 당대 최고의 공격수였던 푸스카스의 활약상도 재현된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 아침 비가 쏟아지자 독일 선수들의 얼굴은 환해진다. 수중전을 예상하고 '비밀병기'를 준비했기때문이다. 비밀병기는 축구화에 착탈이 자유로운 나사형 스터드였다. 제공자는 훗날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회사로 성장하는 독일 아디다스사의 대표 '아디'다. 헝가리 선수들이 진창 운동장에서 미끄러진 반면 독일 선수들은 '신기술'에 힘입어 우승컵을 거머쥔다. 영화는 그렇게 베른의 기적이 라인강의 기적과 다름 없음을, 월드컵 우승이 독일 경제 부흥의 신호탄이었음을 역설한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뉴스A/S☞'베른의 기적' 이해에 도움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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