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 수사에 축소ㆍ은폐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한 권은희(40) 관악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이 20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압력을 행사했다고 지목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법원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해 부담을 가진데다 경찰 내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까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권 과장은 “김용판(56) 전 서울청장에 대한 항소심에 증인으로 출석한 뒤부터 주위 사람들과 의논하며 사직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국정원 수사를 축소ㆍ은폐해 불법 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청장이 항소심에서 다시 무죄 선고를 받은 지 꼭 보름만이다.
법원은 축소ㆍ은폐를 지시한 ‘윗선’으로 지목된 김 전 청장에 대한 올해 2월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1심에서 법원은 “상호 진술에 모순이 없는 다른 (경찰측) 증인들의 진술을 모두 배척하면서까지 믿을만한 특단의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권 과장의 진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권 과장은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직원의 것으로 보이는 아이디, 닉네임 40개 등) 자료가 수사팀에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수사결과가 발표된 것의 적법성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항소심에서도 권 과장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권 과장은 서울 수서서 수사과장으로 있던 2012년 12월 국정원의 대선 불법개입 의혹 수사를 지휘하다 두 달 만에 송파서 수사과장으로 전보됐다. 이듬해 4월 16일 경찰이 “정치 관여이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다”라는 석연치 않은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권 과장은 “경찰 윗선이 개입해 수사를 축소ㆍ은폐하려고 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지난해 9월 25일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국정원과 서울경찰청의 유착 의혹에 대해 “수사 방향을 설정할 때 양측의 반응이 사안마다 똑같아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이유 등으로 경고 조치를 받았다. 올해 1월 총경 승진에서 탈락했고, 2월 관악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전보돼 인사 보복 논란이 일었다.
권 과장은 이날 관악서 참모회의 참석 후 오전 11시 30분쯤 경무계에 사직서를 냈다. 사직 사유에는 ‘일신상의 이유’라고만 썼다. 권 과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들을 만나 “사직서를 냈어도 수리 전까지는 공무원 신분이니 수표수리 예정일인 다음달 1일 심경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했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그는 “고민과 걱정, 생각이 항상 많았는데 마음이 정리돼 오히려 편안하다”며 여유로운 표정을 보였다. 권 과장은 “어제 강원도에서 한 시민이 ‘응원하겠다. 힘내라’며 경찰서로 건강음식을 보냈는데 오늘 사직하게 됐으니 전화 한 번 드려야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권 과장은 9년 만에 경찰 생활을 마치게 된다. 그는 2001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05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경정 특별채용을 통해 경찰에 들어왔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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