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영시암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백담사에서 영시암으로 오는 길보다 한결 고즈넉했습니다. 설악의 능선 중 하늘과 가장 가까운 대청봉을 제 때 발아래 두려면 시간에 마냥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해서 사람들은 길이 둘로 갈리는 갈래길에서 오세암 보다는 봉정암으로 가는 길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튼튼한 폐활량으로 발빠른 등산객들이 가파른 봉정암을 택할 때, 새로 만난 등산 스틱에 뒤뚱뒤뚱 발이 꼬여 시종일관 헥헥 거리는 저를 일행은 오세암의 한적한 길로 이끌었습니다.
꼬꼬마 시절에 읽었던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이 어렴풋이 기억났습니다. 동해의 어느 바닷가 포구, 눈이 먼 누나와 어린 남동생이 먹을 것을 구걸하며 방랑합니다. 스님은 남매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습니다. 남동생의 이름은 길손이고, 누나의 이름은 감이랍니다. 누이의 이름을 자기가 직접 지었다고 자랑하는 남동생에게 스님이 이유를 묻습니다. 누나는 눈을 감아서 감이라고 대답합니다. 소년이 스님의 머리에 씨가 뿌려져 있다며 웃습니다. 소년의 맑은 심성을 스님은 단박에 알아봅니다. 그리곤 설악산 관음사로 남매를 데려 갑니다.
오세암으로 향하는 길은 잔잔했습니다. 어떤 풍경은 원경에서 멀찍이 바라보아야 제 맛이 나지만, 어떤 풍경은 근경에서 친밀히 들여다 보아야 그 멋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맑은 계곡물은 호쾌한 대신 단아하게 흘렀고, 바람의 손길이 묻어나는 나뭇잎 소리는 사색을 일깨웠으며, 때때로 까마귀가 날아와 발 밑에 붙들려 있던 시선을 하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아련한 풍광과 현재의 이야기는 그만큼 비현실적입니다. 동화 속 아이들도 이 길을 걸어갔겠지요.
감이는 주방 일을 거들며 사찰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다섯 살짜리 길손이는 짓궂은 장난으로 조용한 절집을 순식간에 들썩여 놓았습니다. 법회 중 방귀를 뀌고 깔깔거리거나, 선방에 날짐승을 몰아넣고 푸다닥거리거나, 스님들 신발을 몽땅 나무에 달아놓거나, 기껏해야 풍경과 바람소리가 전부이던 사찰의 고요한 정적에 꼬마의 활력은 굉음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참선에 열중하던 스님들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머리에 씨앗이 뿌려져있는 스님은 길손이만 데리고 설악산 깊은 자락으로 들어갑니다.
한 겨울 식량이 동이나 스님은 길손이만 암자에 두고 마을로 내려갑니다. 거대한 폭설이 내려 온 산하를 뒤덮습니다. 스님은 눈길을 헤치며 걷다 정신을 잃습니다. 다행히 마을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암자에 두고 온 꼬마 생각뿐입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치고 낙담합니다.
저 역시 오세암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꽤 깊은 산자락이어서 마을로 내려가는 막차 시간을 고려했던 탓입니다. 동화에서 깨어난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지요. 대신 청아한 계곡 옆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로 합니다. 취사금지를 어긴 범법도 불사하겠다며 코펠과 버너를 호기롭게 챙겨온 일행은 아쉽게도 그 일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즈넉한 곳이라 자리잡았던 보금자리는 다른 등산객들의 마음마저 길목에서 쉽게 이끌어 내었거든요. 결정적으로 버너가 불발이었지만요.
그런데 이때, 다람쥐 한마리가 찾아왔습니다. 사과와 파프리카 조각을 던져주니 두 손을 곱게 모아 사각거립니다. 다람쥐의 맑은 눈빛과 마주쳤을 때, 동화 속 꼬마가 애잔하게 떠오릅니다. 눈이 녹자마자 스님과 누이는 암자에 달려갑니다. 놀랍게도 꼬마는 골방 벽에 그려진 관음보살을 바라본 채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얘기하는데 돌연 감이가 눈을 뜹니다. 하지만 길손이는 이 기적을 뒤로 하고 그림 속 관음보살의 팔에 안겨 하늘로 올라갑니다. 설악산 ‘오세암’은 이처럼 다섯 살 아이의 순수한 영혼을 기리고 있습니다. 다람쥐의 맑은 눈빛, 사색을 일깨우던 바람소리, 청아한 계곡, 그리고 당신의 뒷모습. 언젠가 오세암을 다시 찾아 길에서 길로 떠난 길손이의 맑은 영혼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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