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이 타협할 때 질서의 평화적 변경 가능"
요즘도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역사학자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19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서였다. 하지만 지혜가 얕아서인지, 번역이 어려워서인지 감흥은 별로 없었다. 단지 유행가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구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대학 시절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E.H.카의 다른 저술을 읽지 않았다. 저자에 대해 더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러다 2000년대 후반 외교부를 출입하고 국제관계에 관심을 두면서 읽은 책이 그의 ‘20년의 위기’다. 외교 전공 학생들이 한 번쯤 읽는 국제정치학의 고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일반 독자도 작심하지 않으면 일독이 쉽지 않다. 고전이 으레 그렇듯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있기에 그런 명성을 얻는다. 딱딱하고 어렵지만 20년의 위기가 바로 그렇다.
20년의 위기는 이른바 ‘전간기’(戰間期) 즉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19년부터 1939년 사이 유럽의 위기를 말한다. E.H 카는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 4년간의 전쟁으로 9,000만명의 인명이 살상된 세계대전의 대참화를 겪고도 왜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전쟁의 위기를 거듭하는지를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책 첫 머리에 ‘미래의 평화 수립자들에게(TO THE MAKERS OF THE COMING PEACE)’라고 쓰고 그들에게 책을 헌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간기를 이렇게 진단한다. “첫 10년간은 온갖 희망에 차 있다가, 그 다음 10년간 엄청난 절망으로 급전직하했다. 바꿔 말하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서, 이상을 잃은 현실로 급작스럽게 떨어졌다.” 여기서 이상이란 영국의 패권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세계지만, 사실은 수명을 다한 구질서가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잃은 현실은 맹목과 비합리가 지배하는 자연의 세계가 되더라는 것이다.
전간기와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지금의 세계질서도 변하고 있다. 세계의 패권국가 미국은 금융위기와 몇 차례 지역분쟁에 개입하면서 점점 힘과 영향력을 잃고 있다.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의 신장이 맞물려 G2 국가로 우뚝 서 세계 곳곳에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현상 유지 세력(미국)과 현상 변경 세력(중국)간의 마찰, 도전과 응전의 양상이 공교롭게도 동북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직 자연의 세계까지 도달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외교적 충돌은 물론이고 일촉즉발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가는 일이 잦아졌다. E.H 카가 유럽에서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의 등장이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했듯 일본의 우경화 바람도 결국 동북아 질서변화의 한 양상이자 결과다.
질서의 변화를 피할 수 없다면 평화적 변경이 가능할까. E.H 카는 서로가 인정하는 정의의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공통된 감정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점을 평화적 변경 절차 수립의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들었다. 한일관계에서 지금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양국 정부의 인식 차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E.H 카는 실제에 있어 정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라는 이상주의적 관념과 변화된 세력 균형에 대한 기계적 적응이라는 현실주의적 관념의 타협점 위에서만 평화적 변경이 가능하다고 했다. 평화의 불안정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동북아 상황의 긴장완화 방안과 관련해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 있겠다. E.H 카는 1916년부터 1936년까지 20년 동안 영국 외교관으로 활약했고 더 타임스 편집부국장을 지냈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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