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세계사
데이비드 골드블라트 지음ㆍ서강목 등 옮김
실천문학사 발행ㆍ1,248쪽ㆍ4만8,000원
英, '공차기' 근대 축구로 거듭나 제국주의 덕에 급속히 세계화
각국 다른 사회적 맥락서 토착화 아프리카, 제국주의 대항 무기로
남미 군사독재시절 아픈 과거도 한ㆍ일, 후기산업화 국면서 성장
“어떤 이들은 축구가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믿는다. 난 그런 태도가 몹시 못마땅하다. 장담컨대, 축구는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축구를 목숨보다 더 중요시한 빌 생클리 전 리버풀 FC 감독 정도까진 아니어도 사람들은 요즘 축구에 몰두하고 있다. 주로 새벽에 중계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월드컵 기간 동안 수면부족을 호소할 국내 축구팬이 적지 않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구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30억명이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을 시청했다.
가히 축구는 인류를 지배하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일상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축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분명 사회와 정치와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학교는 축구가 인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가르쳐주려 하지 않는다. ‘축구의 세계사’는 이런 아쉬움에 대한 좋은 대안이 될 듯하다.
영국의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축구의 근원부터 발달, 전세계적 정착, 정치와의 관계 등 축구의 역사를 기술한다. 1,248쪽의 방대한 분량 안에 축구의 시초가 담겼고 각 국가의 역사와 버무려진 축구의 발달 과정이 그려졌다. 축구의 문화사이자 축구의 사회사이며 축구 그 자체를 품은 책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축구가 탄생하기 전 축구의 기원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은 쿠주, 일본은 케마리를 고대로부터 즐겼고 다른 지역에도 축구와 비견할 ‘공놀이’가 많았다. 하고 많은 원시 형태의 축구 중 영국의 ‘공차기’가 근대 축구로 거듭난 데는 영국적 특수성이 작용했다.
당초 영국에서 축구는 천박한 운동이라는 이유로 배척 당했다. “무법한 건달들이 몰려다니며, 사업을 방해해서 근면한 이들에게는 손해를 입히고 선량한 이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을 안기며 아무에게나 폭력을 행사하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재산에도 해를 끼친다”(52쪽)는 이유에서였다.
19세기 중반 축구는 영국 상류계급의 교육기관인 명문 사립학교에 교육의 일환으로 채택됐다. 사립학교 출신이 대부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진학하거나 군대에 진출하면서 축구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축구 규정이 서면화됐고 축구협회가 구성됐다. 19세기 말 산업화로 노동계급이 축구를 즐기면서 대중화가 이뤄졌다. 초등의무교육이 실시돼 노동자들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 축구를 다룬 신문과 잡지 등 2차 시장이 창출됐고 축구의 산업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축구는 직종과 출신 배경 등이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좀 더 포괄적인 지리적 배경과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됐다.
영국 제국주의 덕분에 축구는 세계화를 급속히 이룩했다. 영국에서 축구가 착근에 성공한 것처럼 여러 국가가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축구를 받아들였고 토착화했다. 아프리카 등 서구 식민지역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로 축구를 활용했다. 식민지를 벗어난 뒤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홍보수단이 됐다. 작은 신생국가들에게 월드컵은 체제를 알리고 체제의 내부단속을 이끌기 좋은 선전 무대이다.
군사독재시절 남미 축구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부분에선 가슴이 서늘해진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진 뒤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은 좌파 색출작업을 위한 장소로 활용됐다. 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하거나 총살을 당한 이곳에서 쿠데타 두 달 뒤 칠레와 옛 소련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소련 대표팀은 칠레 행을 거부했고 칠레 대표팀은 경기를 하지 않고도 1대0 승리를 거둬 1974년 서독월드컵에 진출했다.
동아시아 지역 축구의 발달을 국가별로 분석한 점도 흥미롭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은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 시점에서 축구가 부상했다고 주장한다. 한일 지도자들은 자국의 산업생산력이 서구 경쟁국들과 대등해지거나 앞서 나가면서 새로운 서비스 산업을 창출하려 했고 프로축구리그가 이에 가장 적합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축구의 성장이 초고도 산업화를 배경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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