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권 95%와 대비
지하경제에 '수북수북'
5년 전인 2009년 6월23일.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원권이 세상에 태어났다. 1973년 1만원권이 등장한 뒤 36년 만에 선보인 최고액권. 새벽부터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앞에서 장사진을 이뤘던 시민들은 신권을 손에 넣고 환호했다. 그날 하루 풀린 5만원권만 3,292만4,000장이었다.
5만원권이 다섯 돌을 맞았다. 이제는 관심이 시들해질 법도 하지만, 인기는 점점 더 폭발적이다. 첫 해인 2009년에는 10조원에 조금 못 미치던 발행잔액이 5월말 현재 44조4,767억원으로 불어났다. 쉴새 없이 찍어져 나오면서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이 무려 8억8,953만장에 달한다는 얘기다. 불혹을 훌쩍 넘긴 1만원권(17억6,781만장)의 절반을 웃도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런데, 이 아이의 행방이 묘연하다. 올해 1~5월 5만원권 환수율은 27.7%에 불과하다. 10장을 풀었는데 다시 집(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것은 3장도 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1만원권의 경우 94.6%(작년 기준)가 ‘귀가’하는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그렇다면 내 지갑에, 또 내 장롱에 5만원권이 수북이 쌓여 있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신용카드 거래가 활성화된 요즘 굳이 5만원권 고액권을 많이 소지해야 할 이유도 별로 없다. 도대체 이 많은 5만원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쯤 되면 ‘5만원권을 찾습니다’라는 광고 전단이라도 뿌려서 전국 수배에 나서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제 발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라도 잘 안다. 우리는 그 동안 숱하게 목격했다. 비리 사고가 터질 때마다 마늘 밭에, 지하창고에, 개인금고에, 또 자동차 트렁크에 5만원권 뭉치가 묻어져 있던 것을. 실증적인 통계는 없지만, 숱한 사례를 볼 때 5만원권이 검은 거래에 이용되고 지하 경제로 흘러 들었다는 건 자명해 보인다. 애당초 이건 5만원권의 탄생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요 논거이기도 했다.
5만원권은 1만원권에 비해 부피가 작아 휴대가 쉽고 보관이 용이하다. 뇌물 거래에 주로 사용된다는 007가방에 1만원 짜리를 채우면 1억원밖에 들어가지 않지만, 5만원 짜리로는 무려 5억원이 채워진다. 사과상자의 뇌물 금액은 5억원에서 25억원으로 불어났고, 1억원 뇌물을 전달하는데 양주 상자 하나면 족하다. 사라지는 5만원권이 늘어날수록 우리 경제의 어두운 그늘이 더 커지고 있다는 우려도 깊어진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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