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5,000원을 돌려주세요.”
5년 전 이맘때 취객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뭘 사려고 지갑을 꺼냈다. 며칠 전 생전 처음 장만한 5만원 지폐가 보이지 않는다. 결코 쓴 일이 없다. 누가 지갑에 손을 댔나. 5,000원짜리는 있는데. 그제서야 떠오른다. 전날 껌껌한 택시 안, 술에 취해 택시기사에게 건넨 지폐가 5,000원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이 비슷한 5만원이라는 사실이.’
동일한 사건이 라디오 사연이나 술자리 안줏거리로 잇따라 등장하자 급기야 5만원과 5,000원 구별법까지 등장했다. ▦5만원(가로 154㎜)은 5,000원보다 손톱 크기(12㎜)만큼 길다 ▦5만원은 띠(홀로그램)가 있다 ▦5만원은 황색, 5,000원은 적황색이다 등등. ‘택시비 계산 전에 실내등을 켜달라고 하라’ ‘음주 전에 따로 보관한다’라는 행동수칙도 있었다. 그 중 압권은 “술에 취하지 말라”였다. 다행히 요즘엔 눈과 손에 익어서인지 둘을 헷갈렸다는 하소연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5만원권은 각종 즐거운 날에 인플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세뱃돈 인플레’, ‘축의금 인플레’ 식이다. 세뱃돈 인플레는 5만원권 발행 기념으로 자녀와 조카들에게 크게 한 턱 쏜 게 발목을 잡은 형국이다. 한번 올린 세뱃돈을 다시 내릴 순 없는 노릇이고, 다른 친척과 비교도 되는데다 아이들의 기대치도 높아지다 보니 세뱃돈이 상향 평준화한 것이다.
더구나 5만원권은 10장을 발행하면 8장 가까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수요가 넘치는 대목에는 만져보기도 힘들다. 특히 설 명절엔 5만원권 품귀 현상이 빚어져 은행마다 ‘1인당 교환 수량을 제한한다’는 안내문까지 붙이곤 한다. 설 즈음 1인당 10장밖에 바꿔주지 않거나 물량이 동이나 동네 은행을 돌아다녔다는 ‘모험담’부터, 5만원이 생기면 미리미리 빳빳하게 보관한다는 나름의 비기까지 떠돈다.
친소관계를 따져 3만원부터 시작했던 축의금의 하한선 기준은 어느새 5만원이 대세가 됐다. 실제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서는 축의금으로 5만원을 낸다는 응답이 10명 중 8명에 달했다. 이게 다 5만원권의 등장 때문이라고 애먼 5만원권에 책임을 전가한다. 식대 등 결혼비용과 물가 상승은 따지지도 않고. 2002년 유로화 출범 때 당시 우리 돈으로 80만원이 넘는 500유로 고액권이 나오는 바람에 커피값이 2, 3배 오르는 등 유럽 전역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단순히 고액권 발행 때문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학계에선 고액권 발행이 소득이나 물가, 환율, 심지어 화폐 수요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니 세뱃돈 인플레니 축의금 인플레니 하는 말들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대한 심리적인 푸념에 가깝다.
5만원권 덕분에 지갑은 얇아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1, 2장만 지니면 대략 급한 지출이 가능한 5만원 지폐 발행은 신용카드 보편화와 맞물리면서 지갑보다는 ‘머니 클립’을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늦은 시각 10만원 수표를 바꾸느라 상점을 찾아 다니거나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수표 뒤편에 일일이 배서하는 불편도 사라졌다. 은행 역시 10만원 자기앞수표 제조와 취급과정에서 생기는 연간 2,800억원의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5만원이 안겨준 생활의 편리와 이득이다. 다만 007가방이나 사과박스에 담을 수 있는 뇌물의 총량이 5배가 늘었다는 건 씁쓸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겠지만.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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