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시인
윗집에 사는 순둥이 개가 마당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심심해진 개는 아랫집 강아지와 놀아볼 요량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고 흠칫 놀라 도망치는 것이다. 주인 말고는 곁을 허락하지 않는 개인데 놀라도 뛸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14년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털을 깎지 않아 판타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신비한 모습이다. 사람으로 치면 산에서 도를 닦다 내려온 나이 지긋한 도사이다.
얼마 전에 우리에서 탈출한 강아지들을 찾아 윗집에 간 적이 있다. 녀석은 아그배나무 그늘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 까불기 바쁜 강아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의젓한 모습을 지켜보는데 주인이 들려준 출생 비밀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녀석의 어미는 야산 바위틈에서 태어난 유기견의 새끼였다. 주인이 친척집에 갔다가 병이 든 중개를 데려다 키우게 되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봐 간신히 병이 나았지만 사람이 다가가면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어딘가 숨어 있다 밥만 먹고 사라졌는데 어느 날 원두막 밑에서 기어 나온 눈 못 뜬 강아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원두막 밑으로 미역국을 밀어 넣었는데 어미와 새끼 모두 사라진 뒤였다. 사람이 없을 때 나타난 어미는 밥만 먹고 사라졌다. 어디로 가나 지켜보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사라지곤 했다. 새끼들이 커서 젖만으로는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어미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밥을 먹고 왼쪽으로 야산을 돌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저씨가 야산 중턱의 염소우리에서 일을 마치고 내려오다 강아지 소리를 들었다. 어미는 야산의 8부 능선 바위틈에서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바구니를 가지고 올라가 바위틈에서 새끼를 꺼내 담았다. 여섯 마리를 바구니에 담았는데 바위틈에서 또 강아지 소리가 났다. 일곱 마리를 꺼내고 혹시나 해서 나뭇가지를 넣어 살폈는데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어미 개는 여덟 마리나 되는 새끼들을 어떻게 옮겨갔을까. 새끼를 키우는 바위틈 반대 방향 먼 길을 돌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구니에 담겨가는 새끼들을 따라오면서 뭐라고 항변했을까. 바구니에 담겨간 새끼들이 마당에 풀려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새끼들이 하나씩 차에 실려 떠나는 걸 지켜보면서 어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집 주위를 빙빙 돌면서 속울음을 울던 어미는 염소를 물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지막으로 남은 새끼를 데리고 집 근처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새끼에게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저씨는 야생이나 다름없는 개들과 친해지려고 애썼다. 고개를 돌린 채 바위틈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새끼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어미 개는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손에 구운 고기를 올리고 눈을 돌린 채 다가갔지만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럴수록 어미 개가 염소를 무는 일이 빈번해졌다. 어느 날, 어미 개가 새끼를 데리고 계곡의 바위틈으로 거처를 옮겼다. 새끼는 병이 심해 당장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어미 개를 친척집으로 보내고 새끼를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기운을 차린 새끼는 어미랑 살던 집 근처의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아저씨가 손에 고기를 올리고 오리걸음으로 다가가 뒤로 팔을 쭉 뻗어도 바위틈에 숨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처마 밑에 개집을 만들고 밥그릇을 가져다 놓았지만 밥을 먹고 다시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예방접종을 해주고 진드기 약을 발라줘야 할 때만 간신히 바위틈에서 새끼를 꺼내왔다.
14년이 흐르는 동안 개와 주인은 조금씩 거리를 좁힌 셈이다. 줄다리기로는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관심을 갖고 조금씩 다가가야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고 거리 또한 좁힐 수 있다. 아저씨는 아침이면 과자봉지를 들고 마당에 나가 개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개는 현관문 앞으로 다가와 잠자리로 삼았고 이제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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