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태동기 배경
불륜남녀 3년 만의 재회 소재로
돈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논쟁
대사빨로 승부 '미련한 연극'
이 연극, 참 미련하다. 4D 영화가 관객의 감각을 시ㆍ청에서 후ㆍ촉으로 확장시키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음향효과를 두른 뮤지컬이 아예 관객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시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단출한 무대 세팅과 속사포 대사만으로 승부를 보는 연극이 있다. 12일 ‘불륜남녀의 3년만의 재회’라는 소재로 막을 올린‘스카이라잇’이다.
심지어 출연 배우가 세 명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두 명뿐이다. 무대 배경도 주인공 집으로 한정돼 있어 오로지 ‘대사 빨’로 극 전체를 끌어가야 한다. 110분 동안 관객이 활용하는 감각은 사실상 청각뿐이다. 17일 오후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스카이라잇’ 히로인 오지혜(46)를 만나 이 ‘미련한’ 연극에 대해 물었다.
“환경보호 때문에 일회용 컵은 사용하지 않아요.” 인터뷰 자리에 놓인 커피잔을 보며 그가 꺼낸 말이다. 그는 평소 머그잔을 제공하지 않는 커피숍은 절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딘가 유별나 보이는 그의 모습이 극중 배역 카이라와 닮았다.
극중 카이라는 이상주의자다. 영국 런던 변두리 허름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빈민 아이들을 가르치고 언젠가 그녀의 학생들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사회복지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민자 등 소수자와만 친분을 쌓는다. 3년 만에 그녀를 찾아온 과거 불륜남 톰(이호재 분)이 자신의 사업 확장을 자랑하며 안락한 삶을 제안해도 그녀는 노동자 계급과 어울려 살겠다며 톰의 제안을 거절한다. 카이라는 극의 배경인 1980년대 영국 사회의 전형적인 좌파다.
배우 오지혜는 2014년 한국의 좌파다. 정의당 지지자인 그는 일상에서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북녘어린이 영양빵공장’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그는 “30대 카이라 역에 40대인 제가 캐스팅된 이유가 바로 자연인 오지혜와 배역 사이의 유사점 때문”이라며 “처음에는 나이대가 안 맞아 거절했지만, 배역과 배우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설득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카이라와 배우 오지혜의 모습이 유사한 것처럼, 30년 전 영국 사회를 조명한 ‘스카이라잇’은 시공간을 초월해 대한민국 현실을 꿰뚫는다. 연극은 불륜 코드라는 표피를 쓴 채 자본과 노동의 극심한 대립을 역설한다. 오지혜는 “연극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데 ‘돈이 최고’라는 톰과 ‘사람이 먼저’라는 카이라의 논쟁을 보고 있으면 신자유주의 태동기를 배경으로 한 이 연극이 왜 2014년 대학로에 올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카이라잇’은 대사량이 많기로 유명한 극작가 데이비드 해어 작이다. 극 초반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오로지 대사를 통해 사적 대화와 공적 담론을 넘나든다. 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중노동일 터. 이에 대해 오지혜는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연극보다 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했을 정도”라면서도 “공연을 준비하는 두 달 동안 매일 대본을 읽고 또 읽어서인지 이제 카이라 의상을 입고 톰을 대면하면 저절로 대사가 나온다”고 말했다.
“공연에 스펙터클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그의 말처럼 연극은 카이라의 아파트를 떠나는 톰의 모습 역시 담담하게 처리한다. 무대에서만이라도 자본과 노동의 공존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기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린다. 연극은 바로 다음 장면에 톰의 아들 에드워드(조민교 분)가 카이라를 위해 아침 식사를 ‘공수’해오는 내용이 이어지며 막을 내린다.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원하기보다 미래의 가능성에 주목하라”말하는 듯하다. 표현방식과 메시지에서 모두 정공법을 택한 이 연극은, 그래서 끝까지 참 ‘미련하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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