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좋은 데는 죽파계곡이지. 거기는 외지사람들은 잘 몰라. 영양사람들만 가지”수비면소재지 수향다방 여주인의 자랑이 이어진다. “하늘이 안보여. 작년 여름 휴가 때 손주들 데리고 물놀이 갔는데 애들이 몸을 오들오들 떨더라고. 불을 피워 몸을 녹여가면서 놀았다니까”
그의 말만 믿고 죽파로 행선지를 돌렸다. 입구부터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송하리에서 기산리로 넘어가는 도로는 마을이 끝나자 비포장으로 바뀌었다. 비포장 도로를 300여m 달린 지점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방향을 틀었다.
계곡 입구 왼편에 쌓아놓은 목재 더미를 지나 두어 구비 돌자 자동차를 끌고 온 게 슬슬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도로는 차량바퀴가 지나는 곳만 맨땅을 드러내 오솔길 두 개가 나란히 이어지는 느낌이다. 충분히 나무그늘이 만들어져 차량 계기판의 외부 온도는 어느새 26도에서 22도로 떨어져 있었다. 이쯤 되면 차는 이미 거추장스런 짐이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에 끌리는 자유의지는, 달리지도 못하는 무거운 쇳덩이에 꼼짝없이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30분을 천천히 운전해 6km를 거슬러 올라서야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죽파계곡의 마지막 농부, 농막에서 맛본 왕후의 식사
계곡이 좁아지는 비탈엔 아직 작년에 수확하고 정리하지 못한 고추대궁이 허옇게 밭을 덮고 있었다. 분명히 고추대를 뽑는 것 같지는 않는데 김옥충(67)씨 부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랑을 오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왔냐며 새참으로 가져온 소주를 한잔 권했다. 뜻밖의 길손이 싫지 않은 눈치다. “애들도 다 컸고, 나이도 들고, 이제 많이 못해” 그래서 올 해 처음으로 수세미를 심고 김을 매던 중이었다. 수세미 줄기가 타고 오르도록 고추대는 정리하지 않았다.
“오늘 잘 됐네, 점심 찬거리나 하러 갈까?”
소주를 두어 잔 들이킨 김씨가 트럭에서 큰 해머를 들고 나섰다. 영문도 모르고 비탈밭과 붙은 계곡으로 따라 나섰다. 하늘이 안 보인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니었다. 계곡을 감싼 녹음은 짙은 그늘을 만들고 바닥에 비쳐, 깊지 않은 소(沼)마저 초록으로 물들였다. 성근 가지와 잎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은 투명한 물길에 반사돼 끊임없이 흔들거렸다.
‘그물대신 해머’의 이유는 금새 밝혀졌다. 얕은 물속 작은 바위를 내리칠 때마다 기절한 물고기가 한 두 마리씩 떠올랐다. 불과 10여분 만에 검은 비닐봉지에는 버들치를 비롯한 물고기 여남은 마리에 다슬기까지 한 움큼 담겼다. 그 사이 무릎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진 냉기를 기분 좋은 몸부림으로 털어냈다.
일손 뺏은 미안함을 무릅쓰고 집까지 따라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200여m 상류에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다 스러져가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여름 농사철에만 이용하는 김씨의 농막이다.
잡아온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씻은 후 김씨는 근처에서 부추를 한 움큼 뜯어왔다. 다음 과정은 부인의 몫이다. 잘 씻은 물고기와 다슬기를 넣은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조금 풀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자작하게 끓였다. 계피 몇 닢으로 비린내를 잡은 것을 빼면 특별히 요리랄 것도 없는 민물생선조림이었다. 달력 한 장을 찢어 방바닥에 깔고 음식을 차렸다. 이 정도면‘걸인의 상’에 ‘왕후의 식사’다.
이 농막은 죽파계곡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집이다. 지도에는‘새거리’로 표기돼 있지만 김씨의 설명으론 ‘세거리’다. 영양읍 기산리와 수비면 송하리, 그리고 울진군 온정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곳도 한 때는 20여 호가 살던 동네였다. 화전을 일궈 감자와 콩 조 농사를 지었다. “콩 한 가마를 지고 울진 후포까지 장을 보러 가서 생선과 바꿨지. 반대로 후포 장사꾼들은 이곳으로 생선을 팔러 오고. 왕복 100리 길이니까 후포까지 두 시간이 걸렸어” 가벼운 등산배낭 차림으로도 쉽지 않을 길인데, 무거운 짐을 지고 해발 1,000m가 넘는 백암산을 넘어 장을 보러 다녔다는 얘기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보태고 덜어진 얘기인지 확인할 순 없지만 산골살이의 애환과 삶의 무게는 짐작하고도 남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만 허락된 계곡…욕심 낸다면 낙동정맥트레일까지
죽파계곡은 영양사람들만 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영양사람들도 계곡 상류까지 발길을 옮기는 이는 많지 않다. 힘들이지 않고 걷기 편한 임도를 빼면 편의시설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농촌테마마을로 선정된 송하리에서 운영하는 민박과 펜션, 몇몇 체험 프로그램 외에는 관광객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 죽파계곡은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에 연연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은 여행객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 임도가 계곡과 이어졌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새거리까지 이어진다. 그 위로도 임도는 계속되지만 계곡과는 점점 멀어진다. 약 3km상류에서 ‘낙동정맥트레일’코스 5구간(죽파마을~기산마을)과 만난다. 이곳에서 기산마을까지는 4km, 죽파마을까지는 18km다. 물이 없는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 준비와 각오가 필요한 코스다. 단 하루,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숲길과 계곡이 주는 딱 그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송하리~새거리 약6km 구간으로 충분하다.
죽파계곡은 낙동강의 또 다른 발원지다. 백암산 자락에서 시작되는 죽파계곡은 장파천에 물을 대고, 장파천은 반변천으로 이어진다. 반변천은 임하댐을 거쳐 안동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장파천을 막는 영양댐 계획으로 죽파계곡도 수몰위기를 맞고 있다. 김옥충씨도 내심 댐이 생기면 관광인프라도 갖춰지고 마을이 더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농사를 줄일 참에 댐 보상금이라도 받는 게 낫다는 솔직한 말에 웃음으로 대꾸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곳 하나쯤은 그냥 두어도 좋을 것 같다는 외지인의 이기적인 바램만 시린 계곡물에 흘려 보내고 송하리로 발길을 돌렸다.
영양=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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