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석 여론독자부장
20년 전 일이다. 출장 차 간 독일에서 생경한 경험을 했다. 베를린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어디에도 개찰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오더니 그냥 지하철을 집어 탔다. ‘아, 그럼 차 안에서 표 검사를 하겠구나’ 했는데 객실에서도 그런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내리더니 또 그냥 역을 빠져나갔다. 이 장면이 뇌리에 남은 것은 아무도 검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임승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반 호기심 반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인지 잊어버렸지만, 유럽 어디의 기차역에서도 똑 같은 일을 겪었다. 장거리라 요금이 훨씬 비쌌는데도 표 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불시에 검사해 표가 없으면 30배의 요금을 물리지만 그렇다고 이를 악용하는 승객은 거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은 이런 시스템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때 머리에 떠오른 게 ‘불신비용’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게 선진국이구나.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법과 규범을 지키는 것, 신뢰하는 사회이니 개찰구 만드는데 세금을 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 이후 외국에 출장 갈 때마다 ‘불신비용’이란 잣대로 그 사회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파원으로 있던 미국에서는 교통신호에서 그 위력을 봤다. 사거리에도 신호등이 없는 경우가 많은 미국 도로에서는 교차로에 도착한 순서대로 차가 빠져나간다. 특파원 생활 3년 내내 이를 어기는 차를 본 게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내가 어긴 것까지 포함해서다.
미국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보호 좌회전도 마찬가지다. 맞은 편에서 오는 직진 차량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리 있는데도 그 차가 지나갈 때까지 꿈쩍도 않고 기다려 주는 문화이니 비보호 좌회전이란 신호가 가능하다.
이런 예는 교통신호뿐만이 아니다. 시위현장에서, 행락지에서, 쇼핑몰에서, 식당에서… 느끼지 못할 뿐 신뢰의 시스템은 사회 곳곳에서 어김없이 작동한다.
신뢰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존중에서 나온다. 상대를 무시하고 헐뜯고 심지어 짓밟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신망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대통령을 마치고 시골 촌구석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내려간 사람을 중죄인 잡듯 들춰내 결국 자살하게까지 만드는 데서 믿음이 생길 리 없다. 혼외자식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비밀까지 공개적으로 들먹이고 이를 현직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수단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합당한 신뢰를 받을 것이라 자신할 수 없다. 정적이라서 이겨야 한다는 심리는 이해하더라도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상대방을 아예 끝장내 버리겠다고 덤비는 정치에서 리더십과 소통이 생길 리 없다. 야만의 정치이고 정글의 사회일 뿐이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6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더 나은 삶의 질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29위를 했다. 10명 중 불과 2명 꼴인 23%만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했다. 최고를 기록한 스위스(77%)는 물론이고 OECD 평균(38.9%)에도 한참 못 미쳤다. 몇 년 전에는 우리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회원국 중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높고, 이런 갈등으로 인한 경제손실이 연간 82조~246조원에 달한다는 조사도 있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이런 불신과 갈등구조로는 국가개조니, 선진국 진입이니 하는 말은 허망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자질 문제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앞서 안대희 전 대법관이 낙마하는 홍역을 치렀음에도 인사 잡음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논쟁으로 온 나라가 휘청거려야 하는 건지, 고위직 인선을 이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탄식만 나올 뿐이다.
배려와 존중 없이 신뢰는 있을 수 없고, 신뢰 없이 리더십은 생기지 않는다. 비정상의 정상화도 결국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불신사회를 신뢰사회로 바꾸는 것, 이 가치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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