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소통 주문 외면한 문창극 총리 밀어붙이기
국회 부결, 재보선 패배하면 ‘식물 대통령’ 전락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레임덕이란 있을 수가 없다. 레임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퇴임 후 출간한 에세이집 온몸으로 부딪쳐라에서 “나는 레임덕이란 말을 무척 싫어한다”며 남의 일인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그는 레임덕이 자신에게 그렇게 빨리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취임 석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사태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공고하던 권력은 순식간에 와해됐다. 한 번 실추된 권위는 임기 내내 회복되지 않았다.
국민의 건강이나 생명과 연관된 문제를 잘못 대응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경고가 박근혜 정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정권의 무능은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혔다.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는 정권에 민심은 싸늘히 등을 돌렸다. 지방선거 직전 ‘눈물의 담화문’이 아니었으면 박 대통령의 레임덕은 시간의 문제였다.
가까스로 모면했던 레임덕 위기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 통합과 탕평을 주문한 선거 결과와는 반대로 내각과 청와대가 친박 측근들로 채워지자 민심의 이반이 역력하다. 친정체제 구축은 대개 정권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기에는 자신감과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인물을 널리 구하려 애쓴다. 능력과 역량이 발탁의 기준이 된다.
그러다 몇 차례 위기를 맞게 되면 생각이 바뀐다. “역시 믿을 사람은 내 사람뿐”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자신의 의중을 잘 아는 이들과 일하면 손발도 잘 맞고 금방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착각한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힌 박 대통령도 측근을 기용해 정면돌파 하려는 생각을 가졌을 터다.
그러나 인사난맥과 국정실패의 한가운데에 있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국정이 올바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 친일 식민사관, 극단적 반공이데올로기, 빗나간 종교적 신념을 가진 문창극씨를 국무총리에 앉혀놓고 국정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너희끼리 잘 해보라”는 냉소와 방관만이 넘쳐날 게 뻔하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동력은 끼리끼리 풍토에선 절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일하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다. 국정을 추진하는 동력은 이념과 지역, 출신학교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지지고 볶고 하면서 힘을 합칠 때 만들어진다.
박 대통령은 조만간 레임덕 위기를 결정짓는 중대 기로에 놓이게 된다. 문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이 첫 관문이다. 동의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과반인 143표가 필요하다. 새누리당 148명 의원이 모두 찬성표를 던진다면 가능하지만 10여명이 이미 반기를 든 상태다. 표결이 무기명이어서 반란표가 더 나올 여지도 있다.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 박 대통령은 치유 불능의 정치적 내상을 입게 된다.
‘문창극 역풍’은 다음달 재보선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최대 16곳으로 예상되는 재보선 선거구 가운데 절반이 새누리당이 의석을 갖고 있는 수도권과 중부권이다. 문창극 인사 파문으로 박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로 추락한 것을 보면 새누리당 과반 의석 붕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회가 여소야대가 되면 야당의 협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야말로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하게 된다. 내달 중순으로 예정된 새누리당 차기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도 박 대통령에게 중요한 분수령이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자”는 비박의 좌장인 김무성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되면 박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불통과 독선의 국정운영이 용인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문 후보자 지명은 민심을 오독한 박 대통령의 자충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사퇴를 요구하는 데도 아랑곳 않고 밀어붙이는 것은 그보다 더한 무리수다. 레임덕을 재촉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박 대통령 자신이다.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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