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小史]
제141회 - 6월 셋째 주
1994년 6월 17일 저녁, 미국의 방송사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통해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를 비추기 시작했다. 화면에 잡힌 건 포드사의 흰색 브롱코 SUV차량과 그 뒤를 쫓는 십여 대의 경찰 순찰차였다.
전국의 국민들이 발길을 멈추고 TV앞에 몰려들었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100여km가 넘도록 계속됐다. 마침내 경찰차가 브롱코 앞길을 막아 도주로를 차단하자 차에 타고 있던 용의자는 권총을 꺼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며 자살하겠다고 외쳐댔다.
숨가쁜 대치가 끝난 후, 경찰에 체포돼 차량에서 끌려 나온 검은 모습의 사내는 바로 미국의 전설적인 풋볼스타이자 영화배우로 활동하던‘OJ 심슨’이었다.
영웅으로 추앙 받던 심슨이 하루아침에 살인 용의자가 되어 경찰에 체포된 이유는 나흘 전 로스앤젤레스 고급주택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6월 13일 새벽, 미국 캘리포니아주 브렌트우드 주택가에서 인기스타 OJ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애인 로널드 골드먼이 흉기에 찔린 채 사체로 발견됐다. 의심을 품은 경찰 수사관들이 심슨의 집을 방문했지만 그는 집에 없었고 다음날 경찰에 출두해 업무차 시카고를 다녀왔다며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전처의 사망소식에 눈물까지 떨구던 심슨은 재출두를 약속한 뒤 풀려나왔고 이틀 후 2명의 자녀와 함께 전처 니콜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사이 경찰은 그의 집에서 피 묻은 장갑과 스키마스크를 찾아냈다. 현장에서 채취한 심슨의 혈흔과 장갑에 묻은 피해자의 혈액이 일치했으니 거의 완벽한 물증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출두 예정일인 17일, 심슨은 친구 앞으로 “나는 니콜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편지를 남긴 후 종적을 감춰버렸다. 즉각 수배령을 내린 경찰은 이날 고속도로에서 때아닌 활극을 벌였고 체포된 심슨은 6일간의 조사 끝에 2중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1995년 10월 3일 오전 10시, 미국민을 비롯한 전 세계의 관심 속에 세기의 재판이 열렸고세시간의 의견 조율 끝에 배심원단은 판결문을 낭독했다. “OJ 심슨 무죄!”
숱한 증거와 합리적 의심에도 불구하고 ‘드림팀’이라 일컬어진 심슨의 변호인단은 유색인이 다수였던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 평결을 이끌어냈다. 유죄를 확신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미국사회는 흑백으로 양분됐고 배심원으로 대표되는 사법체계는 불신과 혼란에 휩싸였다.
심슨은 형사처벌은 면했지만 피해자 유가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패소해 3천만 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하며 결국 빈털터리가 됐다. 그리고 2008년,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발생한 무장강도 사건에 연루돼 33년 형을 선고 받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논란은 있지만 미국의 배심원제 또한 유지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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