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가해자가 음주운전을 한 정황이 분명한데도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음주측정을 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대리기사 A(59)씨는 5월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와 허리에 부상을 입고 약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그는 “가해자의 음주운전 여부가 입증되지 않아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됐다”며 “운전을 할 수도 없어 당장 생계가 곤란한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5월 18일 오후 11시. 대리운전을 위해 서울 구로구 모 음식점의 손님을 찾아가던 A씨는 도착 전 “길이 복잡해 오토바이로 태워주겠다”는 사장의 거듭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오토바이는 이후 구로동 L마트 사거리에 진입, 구일역 방향으로 좌회전을 시도하다 맞은편에서 동시신호를 받고 좌회전하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충돌과 함께 A씨는 도로 위로 나뒹굴었고, 몇 분 후 경찰과 119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A씨는 “구급대원에 앞서 날 일으켜 세우다 얼굴을 가까이한 사장에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며 “주변 경찰이 듣도록 ‘이 사람 술 마셨다’고 외쳤다”고 말했다. 이후 A씨는 병원으로 이송되며 당연히 사장에 대한 음주측정이 이뤄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장의 음주운전은 입증되지 않았다. 경찰은 A씨에게 “피해자가 직접 음주측정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사장은 A씨에 통보 없이 본인 과실을 인정, 모든 피해를 보상하는 선에서 사고 승용차 보험 회사 측과 합의를 끝냈다. A씨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데다, 사고 오토바이가 책임보험에만 가입돼 한도 160만원 이상의 밀린 병원비마저 모두 물게 됐다.
서울 구로경찰서 청문감사실은 “억울하다”며 진상조사를 요구한 A씨에게 최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사해 문제가 없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내놨다. 현행법상 음주운전은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과실에 속하지만 음주측정 여부는 경찰의 의무가 아닌 재량에 따르기 때문이다.
박상진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음주운전 여부는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만큼 사고 현장에서 반드시 조사돼야 한다”며 “경황이 없는 피해자에게 직접 음주측정을 요구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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