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가 된 아빠' 가족대책위 부위원장 전명선씨 팽목항 달려오니 아수라장 눈도 안 감기고 시신 공개 안되겠다 싶어 직접 나서 '계장님' 별명 붙도록 일해 아들은 지난달 15일 발견 "유학간 줄 아는 어머님께 어떻게 말씀 드려야할지..."
20년 평범했던 직장인 세월호 참사로 투사가 되다
[부제목]전명선 세월호 가족대책위 부위원장 “트라우마 치료도 진상규명 끝나야”
“희생자 가족들의 트라우마 치료요? 진상 규명을 통해 관련자 처벌까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키 174㎝에 몸무게 61㎏. 깡마른 체격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성은 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 희생자ㆍ실종자ㆍ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명선(43)씨다.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고 전찬호(17)군의 아버지이다. 세월호 침몰 참사 2달째를 맞는 15일 안산 합동분향소 옆 가족대책위 사무실에서 전씨를 만났다.
4월 16일 사고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전남 진도로 달려온 전씨의 눈 앞에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생존자 소재를 공지하던 정부 관계자가 같은 말을 맴돌기 시작했다. 수색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자 학부모들이 폭발했다. 전씨는 마이크를 빼앗아 발로 밟고 있었다. “해경, 해군, 교육청까지 공무원들이 현장에 있었지만 책임 있는 말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더군요.”
이틀 후부터 시신들이 수습돼 팽목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신에는 모래가 묻고 눈도 제대로 감겨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고인에게 할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정부에 첫 번째 요구를 했다. “시신 얼굴이라도 닦아달라.” 그는 검안소, 상황실, 유족 숙소 설치 등 가족들의 요구를 전달했다. 그 때부터 가족들은 할 말이 있으면 전씨를 찾았다. 20년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던 전씨는 그렇게 투사가 돼가고 있었다.
팽목항 자원봉사자들은 전씨를 “계장님”이라고 불렀다. 팽목항의 안산시청 천막에 상주하는데다 온갖 요구사항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를 공무원으로 안 것이다. 한 공무원은 전씨에 대해 “자식 잃은 아버지답지 않게 냉정하고 논리적”이라고 말했다. 이미 마음 속에서 아들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사고 이튿날 바닷물에 손을 넣었는데 차갑더군요. 이 수온에서는 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죠. 가족에게는 에어포켓이 있을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날 전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사고 30일만인 지난달 15일 아들이 발견되자 전씨는 ‘계장님’에서 아버지로 돌아왔다. 사고 이후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전씨는 팽목항 시신확인소에서 아들을 끌어안고 30분을 목놓아 울었다.
안산으로 돌아와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전씨는 더 바빠졌다. 지난달 26일 가족대책위가 만든 ▦진상조사 ▦장례ㆍ추모사업 ▦실종자 가족 지원 ▦심리치료 및 생계지원 등 4개 분과 중 진상조사 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전씨는 유가족들의 동의를 받아 숨진 학생들의 휴대폰 메모리를 복구해 사고 당시 영상, 학생들이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 등을 확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도 현장을 오가며 세월호의 교신 내역, 침몰 당시 목격자 진술, 선체에 진입한 잠수사들의 증언 등을 모으고 있다.
그는 아직 아들의 사망신고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시고 사는 장모님께도, 어머니께도 충격을 받으실까 봐 유학 갔다고 했어요. 찬호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씀 드릴지 걱정입니다.” 가족들 생각에 잠시 흔들리는 듯하던 전씨는 인터뷰 중간에도 쉴새 없이 울리던 휴대폰을 받았다. “아직 갈 길이 멀잖아요. 그래요. 힘내야죠.”
안산=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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