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저씨 대단했다. 보통 택시기사가 다양한 승객들을 만나며 여론을 정리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이 분의 선택은 이름도 모를 수많은 후보들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근거를 찾아서 주체적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며칠 전 야근 후 귀가하며 만난 택시기사의 이야기다.
우선 경기도지사. 남경필(새누리당) 김진표(새정치민주연합) 후보의 토론회를 보니 남경필 당선자의 말이 합리적이라며 손을 들어줬다. “경기도 공무원이 5만명인데 보육교사 7만명을 공무원으로 전환한다는 김진표 후보의 말은 암만 봐도 아녜요.” 다음 고양시장. 현직 최성 시장(새정치민주연합)이 그간 대과 없이 시정을 이끌었고, 몇 차례 시장과 의원을 가리지 않고 도전한 경쟁 후보는 도통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최 시장에 표를 던졌다. “눈만 오면 제설이 안 돼 일산이 꽉 막히는데도 잘 하는 거냐”고 슬쩍 물었더니 교통사고가 많지 않으니 그건 큰 문제가 아니란다.
조금 어려운 시의원. 도시광역철도(GTX) 연장을 공약으로 내세운 시의원 후보에 대해 “그게 시의원이 할 일이냐”고 맹공하더니 “골목골목마다 동네에 맞게 도서관이니 가로수니 소박한 공약을 내건 후보가 맘에 들었다”고 말했다. “동네 일꾼 뽑는 건데 거창한 공약은 필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도의원도 비슷한 식으로 공약을 검토해 표를 줬고, 광역과 기초의원 비례대표는 자기가 찍은 도지사와 시장에 따라 각각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찍었다고 했다. 이 분이 큰 관심을 두지 않은 후보는 단 하나 교육감이었다. “우리 집 애들이야 다 시집 갔고 손자들은 아직 아가들이니까…”라며 그는 웃었다.
기자를 부끄럽게 만들 만큼 주체적인 그의 정치행위는 놀라웠다. “나야 무당파”라고 말했지만 그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였다. 단호한 대북정책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혹자는 정치성이 선명하지 않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제대로 된 동네 일꾼을 뽑겠다는 그의 신념과 행동이 존경스러웠다.
이 택시기사뿐만 아니다. 주변에는 교육감 선거에 유독 관심을 갖고 일부러 공약을 찾아보고 투표소에 갔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정당 추천이 아니어서 번호도 없는 교육감 후보들 사이에서 진보교육감 13명이 당선된 것이 보수 후보들이 단일화에 실패했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여당 시장을 뽑고도 진보교육감을 선택했다는 유권자들은 새 교육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황망하게도 정치권은 오히려 이런 유권자들의 의식을 못 따르고 있다. 박 대통령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내정은 국민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념적 성향을 따지기 앞서 기본적인 역사관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인사를 지역만 안배해 선정한 꼴이다. 앞서 택시기사와 같은 국민을 너무 무시한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받을 필요 없다” “식민지배와 분단은 하나님의 뜻” 등 논란을 불러일으킨 발언에 대해 문 총리 후보자는 15일 “종교적 인식일 뿐”이라거나 “언론인으로서 한 이야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총리가 되고 나면 그에 맞게 몸가짐을 하겠다는 주장이야말로 허황하기 짝이 없다.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때의 몸가짐은 스스로 고려대 석좌교수직을 차지한 것이었고, 현재 서울대총동창회 부회장으로서는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초빙교수의 월급을 지원받았다. 이 정도쯤은 공직자가 아니어서 용납된다는 말인가.
여당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국을 돌파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문창극 총리는 만들어지겠지만 친일 논란으로 외신에서도 대서특필되는 총리를 둔 국민은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국민의 의식 수준은 세월호 심판론이나 대통령 눈물 등 한차례 ‘바람’을 기대하는 정치권보다 앞서 있다. 이제라도 문창극 총리 카드는 접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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