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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투성이 정보과잉 시대... 오작동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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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투성이 정보과잉 시대... 오작동을 허하라

입력
2014.06.1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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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리 '투명한 스터디'. 텍스트 조명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조합해서 투명한 서재를 설치하고 관객들에게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 가변 크기, 혼합매체, 홍철기 사진
방&리 '투명한 스터디'. 텍스트 조명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조합해서 투명한 서재를 설치하고 관객들에게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 가변 크기, 혼합매체, 홍철기 사진
Sasa[44]의 ‘2013 연례 보고’. 일 년 동안 먹은 자장면 그릇 수, 교통카드 사용 횟수 등 8가지 일상 통계로 작가 자신을 데이터 처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Sasa[44]의 ‘2013 연례 보고’. 일 년 동안 먹은 자장면 그릇 수, 교통카드 사용 횟수 등 8가지 일상 통계로 작가 자신을 데이터 처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오작동 라이브러리' 기획전

정보사회의 혼란 까발리며

주체적 사고의 중요성 강조

중3학생과 작가의 대화

설명 패널 제공, 참신한 시도

정보가 폭발하는 시대다. 누구나 쉽게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고 반색하는 것도 잠시, 자칫 익사하기 쉬운 거대한 파도가 정보의 바다를 휩쓸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넘치지만 우리는 망망대해의 표류자처럼 불안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오작동 라이브러리’는 지식정보사회의 허점을 파고드는 전시다. 작가 9명(팀)이 정보의 작동 오류를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주체적 사유의 가능성을 묻는다. 한국 미술가들을 세대별로 조명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세마(SeMA) 삼색전 중 30~40대 작가들을 지원하는 ‘세마 블루’전시로 방&리(방자영+이윤준), 사사(Sasa[44]), 권죽희, 김경호, 김실비, 김아영, 김황, 이천표, 이행준이 참여했다.

작가들은 저마다 정보를 수집, 가공, 재배열해서 2차 정보를 생산했다. 집요할 만큼 치밀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지식과 정보의 오작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대부분 사이비 지식의 장광설이나 허튼 짓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은 불안정한 지식 체계를 드러냄으로써 주체적 사고를 통한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권죽희는 도서관에서 폐기 처분하려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잘라서 이어 붙였다. 뒤죽박죽 뒤섞인 채 거대한 국수 다발처럼 전시장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백과사전의 최후가 폭주하는 정보의 혼란상을 묘사하는 듯하다.

방&리의 설치작품 ‘투명한 스터디’는 투명하지 않다. 텍스트ㆍ조명ㆍ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조합해서 만든 투명한 서재를 가득 채운 잡다한 정보가 관객을 오리무중에 빠뜨린다. 투명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다가오는 작품이 오늘의 지식정보 환경을 이야기한다.

가장 명쾌하고 강렬한 작품은 사사의 ‘연례 보고’ 연작일 것이다. 그는 매년 자기가 먹은 설렁탕과 자장면 그릇 수, 교통카드 사용 내역, 휴대전화 통화 횟수, 자신의 작업실을 찾아온 이들의 출입 기록, 영화 관람 편 수, 구입한 책 권 수 등 8가지 일상 통계로 개인연감을 내고 있다. 포스터로 제작한 2013년 연례보고는 영어로 인쇄한 텍스트가 전부다. 내용은 이렇다.

“2013년 Sasa[44]는 설렁탕을 37그릇, 자장면을 77그릇 먹었고, 서울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2편 보았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84권 샀고, 교통카드를 52번 이용했고, 휴대전화 통화를 376건 했고, 출퇴근 기록기로 작업실 출입 기록을 61건 얻었으며, 먼저 온 대기인을 51명 기다린 끝에 용무를 보았다고 한다.”

벽에 붙여 놓으니 대단한 선언문처럼 보이는 이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이런 것도 미술이냐’ 싶은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고 흥미롭게 본다. 작가는 외부 정보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데이터 처리함으로써 가공이나 해석 이전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무차별로 쳐들어오는 정보에 포위된 상황을 주체적으로 돌파하는 데 이보다 확고한 선언도 없을 것 같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미술관은 중 3 학생들로 스터디 그룹을 운영했다. 학생들이 작가들과 대화하고 워크숍을 하면서 이해한 내용을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 설명 패널로 제공하고 있다. 관객이 전시의 일부가 되어 참여하는 것은 국내 어느 미술관도 시도한 적이 없는 참신한 접근이다.

전반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전시다. 직설적인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관객의 머리 속에서 오작동을 일으킬 만하다. 오작동은 당연하다. 고장과 오류의 문제 도서관이 오작동 라이브러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작동을 허하라’고 부추기는 전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주류 지식 체계가 오류라고 부르는 것들이 주류의 오작동을 폭로한 예가 많다. 오작동이 두려워 주체적 사고를 억압하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세월호 침몰 사고와 연결 지을 수도 있겠다. 고장 난 채 멀쩡한 것처럼 돌아가는 한국 사회가 오작동을 숨기며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다가 터진 참변이 세월호 사건 아닌가. 가만히 있지 말고 얼마든지 오작동 하시라, 이게 이 전시를 보는 방법이다. 전시는 8월 3일까지 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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