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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대표 악동을 해부하다

입력
2014.06.15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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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의 영화 담당 라제기 기자가 들려주는 '축구 속의 영화, 영화 속의 축구'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월드컵 기간 중 축구경기 이면의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첫회는 거장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축구의 신: 마라도나' 입니다.

축구의 신: 마라도나. 드림웨스트 픽처스 제공.
축구의 신: 마라도나. 드림웨스트 픽처스 제공.

거장 쿠스트리차, 직접 마라도나 만나 인터뷰

축구로 제국주의에 맞선 '상처받은 영웅' 조명

'10만 마라도나교 신자' 등 흥미로운 내용 많아

인간 마라도나-축구의 정치학 '잔재미'

마라도나. 축구 역사상 가장 문제적인 선수다. 현역 시절 축구 천재로 그라운드를 누볐고, 약물 중독 파문으로 팬들을 실망시켰다. 악동으로서 그가 남긴 행동들은 곧잘 스포츠면을 뛰어넘었다. 입이 벌어질 플레이를 수 없이 선보였던 그는 본받아야 할 인물보다 조롱해도 될 인간으로 종종 취급됐다. 그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 한국인들 대부분은 비웃었다. "약장이가 과연 제대로 팀을 이끌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은 아마 이 영화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축구의 신: 마라도나'는 200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고 2010년 국내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개막을 겨냥해 극장을 찾았으나 흥행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전국에서 고작 847명이 봤다. 다큐멘터리라는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외면했지만 흥미로운 내용들이 96분을 채운다. 마라도나를 좋아하는 축구팬도 몰랐을 마라도나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고, 축구의 정치학도 가늠할 수 있다.

마라도나(오른쪽)을 직접 인터뷰 하고 있는 쿠스트리차 감독.
마라도나(오른쪽)을 직접 인터뷰 하고 있는 쿠스트리차 감독.

감독은 에밀 쿠스트리차다(그래서 이 영화의 원제는 'Maradona by Kustricha'다). 유고연방 시절 티토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비판한 영화 '아빠는 출장 중'으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인물이다. 유고연방의 해체를 소재로 삼은 '언더그라운드'로 두번째 황금종려상을 안았다. 국내에는 '집시의 시간'으로 더 유명하다. 유고연방의 해체로 세르비아 국민이 된 이 감독은 마라도나에 대한 궁금증때문에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다. '축구의 신: 마라도나'는 그라운드와 스크린의 대가가 만나 탄생한 영화인셈이다.

쿠스트리차는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집을 방문하고, 마라도나를 세르비아 자신의 집에 초대해 만나며 마라도나의 실체를 알아간다. 둘은 함께 축구를 하며 우정을 다지기도 한다(쿠스트리차가 구둣발로 프리킥을 차는 장면이 나오는데 선수 뺨치는 실력이다). 쿠스트리차의 눈을 빌려 바라본 마라도나는 상처받은 영웅이다. 마라도나가 약물에 손을 대고 폭식으로 한 때 체중 100kg이 넘은 이유는 마라도나가 겪은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됐다고 소개된다. 마라도나는 축구 하나만 믿고 영국과 미국 등 제국주의자들에게 대항했다가 그라운드 안팎에서 시련을 맞게 됐다고 믿는다. 약간 과대망상증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쿠스트리차는 공감을 표시한다. 자신의 조국 세르비아가 미국 등 서구로부터 핍박 받았다는 인식을 마라도나를 통해 은근히 투영한다. 세르비아는 유고연방 해체 과정에서 인종청소를 조장하고, 코소보의 정당한 독립을 막는다며 미국을 위시한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1999년 미군이 중심이 된 나토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쿠스트리차는 마라도나와 세르비아가 제국주의의 탄압을 받는 희생자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다.

1986년 월드컵 아르헨티나-잉글랜드전. 축구팬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마라도나의 '신의 손' 장면이다.
1986년 월드컵 아르헨티나-잉글랜드전. 축구팬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마라도나의 '신의 손' 장면이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마라도나교 신자들의 행태다. 아르헨티나에만 10만명인 것으로 추정되는 마라도나교 신자들에게 신은 당연히 마라도나다. 이들에게 오순절(성령이 강령한 날)은 6월22일이다.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신의 손' 사건을 일으킨 날이다. 마라도나교 신자들은 마라도나가 손으로 골을 성공시킨 모습을 재연하는 것으로 세례를 대신한다.

영화 속에선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마라도나의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난다. 빈민가 출신인 마라도나는 유럽에 진출했을 때 명문구단 FC 바르셀로나를 잠시 거쳐 나폴리에 안착한다. 이탈리아 리그 만년 하위팀이었던 나폴리는 마라도나의 영입으로 금세 최강이 된다. 마라도나는 이탈리아 리그 2회 우승과 1회 준운승, UEFA컵 우승의 영광을 남기고 나폴리를 떠난다. 영화 속에선 마라도나가 떠난지 10년 넘은 시간이 지났어도 마라도나가 여전히 나폴리의 긍지로 여겨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라도나는 남부의 가난한 도시 나폴리에서 뛰면서 북부의 부자 구단 AC밀란과 인터밀란에 단 한번도 지지 않는다. 그는 나폴리에 도착했을 당시 나폴리 팬들과 했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지킨 것을 영화 속에서 자랑스러워 한다.

마라도나가 록밴드 리드보컬로 활약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마라도나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제국주의자들의 음모에 고통 당해야 했던 자신의 삶을 노래로 돌아보는 장면은 조금은 코믹하기도 하다. TV 토크쇼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모습도 나오는데, 이런 장면들을 보다보면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클랜드전쟁의 패배로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마라도나가 준 즐거움만으로도 그에 대한 사랑은 마르고 닳지 않을 듯하다. 손으로 골을 넣는 최악의 플레이를 펼친 뒤 6명을 제치고 월드컵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까지 성공시킨 전대미문의 축구 영웅 아닌가. 아마 잉글랜드 팬들에게는 축구 악마에 불과하겠지만...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축구의 신: 마라도나 (2008). 드림웨스트 픽처스 제공.
축구의 신: 마라도나 (2008). 드림웨스트 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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