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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짜깁기의 난장, 싸이의 '행오버' 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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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짜깁기의 난장, 싸이의 '행오버' 뮤비

입력
2014.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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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행오버’ 뮤직비디오는 폭탄주와 사우나, 중국집, 노래방 등 온갖 것들을 짜깁기한 ‘한국적인 무엇’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한국적이 아닌 ‘아시아적인 무엇’이다.
싸이의 ‘행오버’ 뮤직비디오는 폭탄주와 사우나, 중국집, 노래방 등 온갖 것들을 짜깁기한 ‘한국적인 무엇’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한국적이 아닌 ‘아시아적인 무엇’이다.

사우나ㆍ노래방ㆍ월미도 유원지 등

서양ㆍ일본 문화 뒤섞인 공간들

한국적 지역성을 즐기라는 뻔뻔함이

싸이 본색 '강남스타일' 계보 이어

싸이의 ‘행오버’에 이견이 분분한 것 같다. 나는 음악이든 영상이든 ‘짜깁기’라는 점에서 재밌게 봤다. 이걸 기준으로 ‘행오버’를 보면 좀 다르게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비디오에는 ‘한국적인 풍경’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 ‘한국적인 무엇’은 온갖 것들을 짜깁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폭탄주부터가 양주, 맥주, 소주 등을 섞은 술이다. 사우나, 중국집, 노래방, 월미도 유원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 공간들은 원본을 복사한 공간이다. 한국의 현실적 문화 공간이 대체로 그렇다. 이때 정말 흥미로운 건 이런 풍경들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싸이는 이소룡을 흉내 내고, 스눕 독은 중국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투애니원의 씨엘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보기 힘든) 한자가 쓰인 병풍 앞에서 춤을 춘다. 클라이맥스인 조개구이 집에서 일어난 난장판은 무술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작 한국이 아닌 ‘아시아적인 무엇’이다. 하지만 이 오리엔탈리즘이 미국이라는 제국에서 상상되고 소비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 안에서도 ‘제3세계’는 이미지로만 작동한다. 대신 제국의 문화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와이를 카피해 제주도를, 디즈니랜드를 따라 에버랜드를 만들면 그게 한국의 메이저가 된다. 그러면 그들을 거듭 카피한 부곡 하와이와 월미도 놀이공원이 탄생하는 것이다.

싸이 '행오버' 뮤직비디오 캡처
싸이 '행오버' 뮤직비디오 캡처

보통 이런 근본 없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맥락 없이 뒤섞인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그것으로부터 나름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정체불명의 문화 코드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의지가 없다. 애초부터 싸이의 포지션이 스스로 ‘싸구려’라고 말하는 쪽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행오버’가 무작정 뭔가를 베끼는 건 아니다. 바로 언어 때문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되 받침 없이 누구나 따라 하기 좋은 의성어로 훅(hook)을 만드는 감각은 이 짜깁기에 고유성을 부여한다.

싸이 '행오버' 앨범 사진
싸이 '행오버' 앨범 사진

이런 짜깁기의 감수성은 K팝도 마찬가지다. 주류의 K팝 산업은 ‘한국 자본+유럽(미국) 제작+아시아 판매’라는 구조를 따르는데 ‘강남스타일’은 거기서 벗어난다. 빅뱅이 ‘제주도’라면 싸이는 ‘부곡 하와이’인 셈이다. 그런데 ‘강남스타일’이 성공하면서 졸지에 그가 K팝의 대표자가 되었다. ‘젠틀맨’과 ‘행오버’는 이 딜레마를 돌파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젠틀맨’은 여러 면에서 실패에 가까웠고 ‘행오버’는 그에 대한 대안이란 생각이 든다. ‘젠틀맨’에는 위악이 있지만 뻔뻔함은 없다. ‘행오버’에는 ‘강남스타일’을 만들 때의 자연스러운 뻔뻔함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건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다시 말해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로 시장에 진입하겠다는 기존 한국 아이돌과 대응하는, 싸이 본연의 태도와 가깝다. 이것은 의미 없는 엔터테인먼트니까 ‘예뻐 보일 때까지 빠라삐리뽀~’ 즐기라고 부추긴다. 이 뻔뻔함이야말로 한국의 지역성을 대변하는 요소가 아닐까. 내가 ‘행오버’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본능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지역성(locality)을 포기하지 않는 영리함과 뻔뻔함이다.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는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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