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갇힌 여자와 가둔 남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광기의 시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갇힌 여자와 가둔 남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광기의 시대

입력
2014.06.13 16:58
0 0

유대인 여자와 나치 단원 기묘한 관계가 사랑으로...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

크리스틴 뢰넨스의 ‘갇힌 하늘’은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광기의 제국에 관한 면밀한 분석”, “전쟁이라는 잔학한 행위가 어떻게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열림원 제공
크리스틴 뢰넨스의 ‘갇힌 하늘’은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광기의 제국에 관한 면밀한 분석”, “전쟁이라는 잔학한 행위가 어떻게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열림원 제공

갇힌 하늘 크리스틴 뢰넨스 지음ㆍ박종윤 옮김 열림원 발행ㆍ364쪽ㆍ1만4,000원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의 단편 ‘한 휴머니스트’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오랜 세월 지하실에 숨어있다가 숨을 거두는 한 유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을 잘 믿는 이 휴머니스트는 나치의 학살을 피해 자신의 전 재산을 충실한 하인에게 맡겨두고 지하실로 숨어 들었다. 하지만 충직했던 하인 부부는 종전 사실을 끝내 숨긴 채 지하실에 숨어 있는 주인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고, 유대인 주인은 하인들이 자신의 순진함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비웃는 줄도 모른 채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주는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며 행복하게 죽음을 맞는다. 소름이 돋도록 정치한 인간성의 해부도다.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 후보와 프낙상 그랑프리 후보에 오르며 프랑스 언론의 호평을 받은 크리스틴 뢰넨스의 장편소설 ‘갇힌 하늘’은 유대인 은닉과 거짓말이라는 설정을 남녀간의 사랑과 애정권력의 문제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로맹 가리의 우화적 필치 대신 감정의 현을 쉴 새 없이 조였다 푸는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 미국에서 태어난 벨기에인으로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0대 시절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지방시, 니나리치, 발망, 벤츠 등의 광고모델로 활동한 바 있다. ‘갇힌 하늘’은 1999년 첫 소설을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2008년 나온 작품이다. 작가는 현재 뉴질랜드 국적을 취득해 그곳에서 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히틀러 유겐트의 열성 단원인 10대 소년 요하네스. 독일 제국에 합병된 오스트리아 출신 요하네스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함을 온 몸으로 체현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는 남성적인 소년이다. 하지만 그의 중산계급 부모는 내심 나치를 못마땅해 하고, 요하네스는 부모와 사사건건 불화한다. 군인이 돼 마침내 참전하게 된 요하네스는 집에 갈 때마다 “부대로 복귀해야 할 때가 되어도 슬퍼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분노하고, 이로 인해 “위험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연합군의 포탄에 한쪽 팔과 얼굴 반쪽을 잃고 상이군인이 돼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자신이 그토록 지지해온 나치의 우생학에 따라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회의에 휩싸인다. 그의 흔들리는 마음은 때마침 부모가 3층 다락방의 벽장 뒤에 숨겨준 죽은 누나의 유대인 친구 엘자를 감지해내고, 그는 혐오와 매혹의 양가적 감정 속에서 사랑과 집착에 빠져든다.

소설은 팽팽하다. 성욕에 눈 뜬 열일곱 소년 요하네스와 유대인 약혼자를 그리워하는 엘자 사이의 우정도, 사랑도 아닌 기묘한 관계는 요하네스의 부모가 나치에 처형되면서 생존을 매개로 한 애정권력의 쟁탈로 그 양태가 뒤바뀐다. 이제 지구상에 엘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도,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도 요하네스뿐이다. 하지만 요하네스의 욕망을 온전히 틀어쥔 이도 엘자 하나뿐. 마침내 나치 패배와 함께 울려 퍼진 종전의 낭보. 하지만 요하네스는 농담에서 시작돼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거짓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게 된다.

오랜 세월 어두운 벽장 뒤에서 쥐새끼처럼 살아가야 했던 엘자의 질식된 영혼과 자기 때문에 요하네스가 온 가족을 잃게 됐다는 자책. “엘자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내가 아꼈다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잃고 싶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요하네스의 두려움. 두 사람은 어떤 면에서 거짓말의 공모자였다. 요하네스가 고백의 기미를 보일 때마다 엘자가 기필코 듣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그녀 역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안온해진 은닉의 숨막힘.

“요하네스, 내가 이 창으로 하늘을 보는 동안 바로 옆집의 누군가도 하늘을 볼 거 아냐. 모두가 각자의 프레임 안에 갇힌 그들만의 풍경을 바라보겠지. 이 조각 하늘은 내 삶이야. 내게 주어진 작은 조각의 천국.” 엘자를 가둔 것은 요하네스지만, 요하네스 역시 엘자에게 갇혀 있었다는 점에서 그 둘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을 벌인 셈이다. “나도 모르게 나는 엘자의 새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를 가둔 사람은 엘자였다. 나는 그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나만의 것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