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른 것이겠지만,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 아주 가끔씩은 노년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10년 후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20년, 30년 후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질문들과 함께 수만 가지 경우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것이다. 내게는 노후의 삶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그것이다. 소설 속에는 은퇴한 퇴역군인과 그의 부인이 나온다. 그들은 집 마당에 닭을 키우면서 도착하지 않는 정부의 연금증서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닭은 가끔 장미꽃을 쪼아 먹는다. 나는 이 시퀀스가 이 소설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소설은 이미 충분히, 지나치게, 완성된 것이다. 마르케스는 장미꽃을 쪼아 먹는 닭의 능청스럽도록 한가한 모습과 연금증서를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삶을 소진하는 퇴역군인의 권태를 대비시켜서 삶의 본질이 지닌 희비극을 예리하게 벼려낸 것이다. 그때 마르케스는 소설가로서보다는 시인으로서, 시인으로서보다는 점성술사로서 그렇게 한 것이다. 며칠 전 깊은 밤 강원도 화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퇴계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는 ‘퇴계원’이라는 이름을 혀 위에서 중얼거리면서, 내가 만약 늙어서 소설 속 대령처럼 소일거리로 닭을 치게 된다면 그 닭장의 이름을 ‘퇴계원’이라고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퇴계원이라는 말의 뜻은 ‘물러난 닭들의 동산’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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