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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

입력
2014.06.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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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적폐(積弊)’란 말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지난 4월 29일 이른바 대국민사과 때 쓰더니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도 “적폐를 해소하지 않으면…”을 운운했다. 대통령의 마음을 읽은 까닭인지, 그 마음이 제 마음 같았는지, 아니면 같아 보여야 한다고 여겼는지 정홍원 전 총리를 비롯한 여러 공직자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저 말을 섬기듯 썼다. 절도가 느껴지는 파열음, 참신하면서도 묵직한 어감, 어디든 들이댈 수 있는 권능의 의미 같은 단어 자체의 매력 덕도 있을 것이다. 낙마했지만 안대희 전 대법관도 신임총리 내정 직후 기자회견에서 ‘적폐 일소’를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설던 단어에 불과 한달 여 사이에 반질반질 손때가 앉았다. 각질이 생겼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며칠 전 여럿이 어울린 자리에서 한 공직자는 훈련소 신병의 충성 구호처럼 저 말을 입에 달아 누가 핀잔을 준 일도 있었다.

좋은 말이 구정물을 뒤집어써 후줄근해지는 예는 많다. ‘유신’이 그랬고, ‘정의 사회’가 그랬다. 대통령이 선점한 ‘적폐 해소’도 그리 될까 걱정스럽다. 한국 사회의 적폐가 지금 한계상황이고, 그 결과가 세월호 참사라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적폐 해소는 그러므로, 절박한 계기에 요긴하게 등장한 건 맞다. 하지만 대통령과 이 정부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알몸을 가리기 위한 투명 망토로, 저 보편의 장막을 써버렸다. 그릇된 맥락 안에서 원인으로서의 적폐는 공허해진다. 통시적 관점에서, 못마땅한 모든 현(존)재는 아득한 근원을 지닌 적폐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 당신이 바로 적폐”라고 했다는데, 나는 그 말에 저런 이유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대통령이 적폐냐 아니냐 하는 평가와 판단 역시 나로선 조금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고, 그에게는 헌법이 보장한 임기가 있지 않은가. 지난 대선 과정이 심각하게 오염됐고, 그 문제들을 진지하게 바로잡으려는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대통령이지만, 그래서 적폐라고 부를 수 있고 물러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러나란다고 물러날 대통령이었으면 지금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사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이후가 긍정적이리라 낙관하기 힘들고, 그 과정에서 빚어질 소모적 대립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어쨌건 지금 우리는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박대통령과 그가 상징하는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물러나란 요구는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무를 수 없는 자리로 밀어 올린 표현일 것이다. 그건 바람 피다 들킨 연인에게 끝을 통고하듯, 이제 어떤 기대도 기회도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나는 보다 많은 이들이 좀은 멀찍이서, 찬찬히 묻고 따지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싶다. 적폐의 한국이 건너뛴 계몽의 시대로 각자가 잠깐 돌아가보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도 공허한 말 같다면 지금 이순간부터라도 누가 무엇을 책임지고 회피했는지, 어떤 약속을 지켰고 또 짓밟았는지, 어떤 사람을 썼고 또 버렸는지, 이유는 뭔지 묻고 따지고 들여다보았으면 싶다.

적폐 일소도 그렇다. ‘대통령 당신이 적폐이니 물러나라’고 말하기보다, 당신이 생각하는 적폐의 세목이 뭔지 집요하게 물었으면 싶다. 그게 반공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반동’분류처럼 자의적이고 무분별한 것은 아닌지, 어떻게 얼마나 노력했고 성취했는지 따져 묻고 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할 만큼 했다고 판단되면 누구든, 다음 선거에서 여당 후보를 당당히 찍을 수 있는 사회로 조금씩 변해갔으면 싶다.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는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을 어디서 주워 듣고 든 생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심판이 아니라 심판의 근거들을 모으고 차분히 공유하는 일이다. 다행히 한국은 대통령 단임제 국가다. 누가 국민을 미개하다고 말해 분노를 샀는데, 그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준 책임까지 분노에 묻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최윤필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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