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의 사고 두개의 시선 : 씨랜드 화재
1999년 씨랜드 희생자 유족들 화재 원인을 모기향이라 밝힌 국과수 발표에 불신커지자 수사기록, 전문가 분석 등 담아 자체적으로 또 백서 발간하며 배선 불량 탓 누전가능성 제기 "아직도 정확한 원인 몰라 억울 백서 편찬에 시간 걸리더라도 철저한 검증, 다양한 이견 수렴을"
유치원생 19명과 교사 4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9년 6월 경기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 화재 참사 이후 경기도는 같은 해 12월 200쪽 분량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 화재사고백서(이하 경기 백서)를 펴냈다. 4개월 후 같은 참사를 두고 또 하나의 백서가 세상에 나온다. 씨랜드 참사 백서, 그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이하 유족 백서)란 제목의 희생자 유족회가 펴낸 두 번째 백서다. 정부나 지자체가 아닌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펴낸 최초의 백서로 총 263쪽에 달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는 게 없고 사건은 오히려 더 축소되고 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책을 냈다.” 유족들이 백서 첫 장에서 밝힌 발간 이유다.
●화재 원인 둘러싼 강한 불신
유족들이 또 하나의 백서를 펴낸 이유는 화재 발생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믿음 때문이다. 경기도는 “모기향으로 추정되는 불로 인해 화재가 났고, 수련원 건물 구조상의 결함과 인화성이 강한 건축자재 사용, 인솔교사의 보호 소홀로 대형참사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백서는 ▦처음 불이 난 씨랜드 C동 301호 안에서 모기향이 피워져 있던 부근이 가장 심하게 불탄 점 ▦301호에 설치된 에어컨 및 연결 전선에서 단락흔(전선이 합선되면서 녹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단락흔이 발견된 부분은 301호 천장 밖으로 노출된 부분이어서 직접적인 화재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 등 국과수의 발표를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모기향을 화재 원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을 피운 것으로 좁혀지면서 소망유치원 원장 개인의 과실만 부각됐고, 인명피해를 키운 부실 건축물 운영업자와 이를 허가해 준 공무원들의 책임은 모두 가려지게 됐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백서에서 “정부가 불법 가건물을 허가해준 책임을 면하려 다른 화재원인에 대한 검증 없이 성급히 결론을 냈다”고 주장했다. 지금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 중 일부가 “검찰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비리에만 초점을 맞춘 수사를 진행하면서 해경의 무능한 사고 초동대응과 정부의 선반안전관리에 대한 직무유기가 가려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씨랜드 희생자 유족들은 ▦전력을 외부로 보내는 전기 단자가 심하게 부식돼 있던 점 ▦화재가 처음 발생한 301호에 건물 전체가 쓰는 전기 배선이 설치된 점 ▦전기 배선이 무면허 기술자가 설치해 매우 조악했던 점 등을 들어 누전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제기했다.
화재 발생 9일 뒤 한국화재보험협회와 MBC PD수첩 제작진이 진행한 모기향 모의실험은 이같은 유족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였다. 실험은 씨랜드 건물 모형에 모기향 5개를 설치, 화재 당시와 비슷한 온도에서 모기향을 통해 불이 옮겨 붙었는지를 관찰했다. 방의 옷가지와 이불, 종이류 등도 화재 당시와 똑같이 배치해 실험했지만 불은 붙지 않았다. 당시 모의 실험을 참관한 한국화재보험협회 관계자는 “사고 당시 풍속 등을 고려하면 모기향을 화재원인으로 단정하기 힘들다”고 한 증언도 수록돼 있다.
유족 백서는 이처럼 국과수의 발표를 반박하는 내용으로 절반 이상이 채워졌다. 유족들은 직접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을 참고해 건물 관계자들의 진술과 언론보도, 방재전문가들의 분석 등을 담았다.
● 유족들 “정부 책임 면하려 성급한 결론”
국과수는 화재 원인에 대한 조사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문제는 소통 과정이었다. 국과수는 화재 발생 이틀 만인 1999년 7월2일 “화인은 모기향으로 누전 가능성은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유족들은 “선진국에선 화인 분석에 최소 2~3달이 걸리는데 고작 이틀 만에 이런 중차대한 사고의 원인 발표가 가능하냐”며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화재 현장에서 나온 사고 감정물이 폐기된 것을 놓고도 유족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국과수는 사고 조사를 담당했던 화성경찰서에 감정 결과를 통보하는 공문을 보내며 “감정물 잔량은 발송일로부터 14일 이내 경찰서의 반환 요구가 없을 시 폐기 처분한다”고 명시했다. 규정에 따라 폐기한 것이지만 유족들은 “아무리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국과수라도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감정물을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폐기해야 했는지 납득이 안 간다”고 지적했다.
유족들의 반발이 극심하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유족이 원하면 재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국과수는 “국가기관의 전문가들이 철저하게 감식한 만큼 재조사는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최근 한 유족은“조사 결과를 번복하는 전례를 남기면 권위에 흠집이 갈까 우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입장에선 억울할 뿐”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어떻게
경기도가 사고 발생 4개월 만에 백서 발간 계획을 밝히자 유족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 무슨 백서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경기도는 국과수와 경찰, 검찰 등의 공식 발표 자료를 참고로 한 백서 발간을 강행했다. 유족 측이 제기한 화재 원인 의혹에 대해서는 “누전 가능성 등 다른 화재원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유족들이 촉구했다”는 수준의 내용을 A4지 반 페이지 정도로 간단히 정리했다.
정부나 지자체나 펴낸 다른 재난 관련 백서와 마찬가지로 씨랜드 화재에 대한 경기 백서 역시 정부 기관이 발표한 관련자료를 토대로 했을 뿐 다른 전문가들의 이견이나 유족 측의 비판적 입장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전반적으로 유족들에게 큰 불신을 안겨주었고 아직도 화재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인식을 깊이 남기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 역시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데 씨랜드 백서가 주는 메시지가 적잖다. 이재은 충북대 행정학과 교수는 “선진국에선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검증 결과와 다양한 이견을 백서에 온전히 반영한다”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만든 정부 백서가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기 위해선 피해자나 유족들도 수긍할 만한 방대한 자료조사가 이뤄지고, 내용이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백서 발간 과정에 정부부처 대표뿐 아니라 유족 대표,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시민단체 대표 등도 포괄적으로 참여해 불신을 없애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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