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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하의 날들

입력
2014.06.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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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이 떠나지 않는다. 몇 년 새 일기에 썼거나, 자주 중얼거렸던 말이다. 낮게 깔린 구름이 도시를 짓누르듯, 그런 무채색의 무거운 기운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유를 고민해보지 않았다. 사적인 문제인지,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지, 지역적인 이유인지 아니면 전지구적인 현상인지, 내가 스스로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간 것인지, 혹은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결백한 것인지. 답을 찾고 싶지 않았다. 찾는다고 해서 구해질 것 같지 않았다.

2년 전 봄, 막 초고를 끝낸 장편소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해 봄 오랫동안 계획했던 글을 포기했다. 모르겠다, 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자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썼다. 약간의 기대를 품고, 혹은 약속 때문에, 아니면 습관적으로, 이런 저런 글을 썼고 그럴수록 나 자신이 싫어졌다.

한달 전 나는 내가 책을 쓰는 법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부터 몰랐던 건지, 아니면 모르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 동안 나는 그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목표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독자들을 향해 책 비슷해 보이는 뭔가를 꾸며낸 것이 아닌가? 문학, 인간, 세계 따위의 허황된 구호들로 이루어진 지극히 도식적인 세계를 머리에 띄워놓고는 수능 1등급을 노리는 모범생처럼 나만의 고3 시기를 보낸 게 아닌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것. 그게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배운 것이다. 내가 아는 삶의 방식은 그것 뿐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나는 점점 모든 종류의 지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한동안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매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시내에 나가 커피를 마시고, 카페인 기운에 의지해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말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커피 기운이 떨어지면 단 것을 사먹었다. 집에 돌아와 일찍 잤다.

나는 나를 개처럼 사육했다. 십대 후반에 일기에 썼고, 한동안 자주 중얼거렸던 말이다. 어딘가 소설 같은 데 써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의 나는 겉보기에 꽤 그럴듯한 우등생이었는데,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몰아붙였다. 그런데 내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서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성과가 있었으므로, 오히려 칭찬이나 부러움을 샀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 종종 문학에 삶을 바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면 명문대 진학을 위해 학창시절을 바치라는 얘기를 늘어놓는 담임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깊은 적의가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똑똑한 말을 늘어놓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를 강요하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그러니까 대체 뭘 위해서 계속해서 나아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거듭 나아져서 뭐가 되겠다는 것인가? 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은데, 이런 저런 것들을 위해 삶을 바치라는 이야기들만 주위에 가득하다.

요즘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쓴 글들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새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좀 나아졌다고 다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여전히 나는 단순하고 극적인 스토리에 매료된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삶은 극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한 이 무기력과 무모함의 소모적인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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