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색깔은 내용 못지 않은 정치적 함의 내포
빛의 광학적 반응처럼 사회 다양성 끌어내야
지방선거 투표를 마치고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요즘 증국집은 예전 같지 않다. 젊은 층의 중국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진 탓에 손님은 중ㆍ장년층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20~30년 전에 멎은 것처럼 가구 집기들도 옛 것들이다. 중년의 여자 주인이 개표 방송을 보고 있는 한 손님에게 묻는다. “정당 이름이 자꾸 바뀌어 외우지 못하겠네요, 어느 쪽이 진보고, 어느 쪽이 보수예요? 빨강이에요? 파랑이에요?” 손님이 머리를 긁적인다. “글쎄, 저도 모르겠네요. 매번 바뀌니까요.”
전통적으로 보수정당은 파랑색, 진보정당은 붉은색이나 노란색을 선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반대로 보수정당이 붉은색, 진보정당이 파랑색을 사용해 헷갈리게 만들었다. 혹시나 미국 보수정당인 공화당이 붉은색, 진보정당인 민주당이 푸른색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과 주파수를 맞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왜 최근 우리나라 정당뿐 아니라 세계 모든 정당들은 색을 중요시할까? 색채가 가진 상징성과 함께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해진 오늘날 문화에서 감정을 유발하는데 색채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열정과 변화를 나타낸다. 파란색은 생명의 탄생, 희망, 신뢰를 나타낸다. 과학에서도 지난 수백 년간 색채에 대해 적지 않은 연구가 이뤄졌다. 아주 옛날부터 삼각형 모양의 유리통, 즉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무지개 색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을 알았고, 이걸 과학적으로 분석한 뉴턴은 빛이 색깔마다 다른 무게를 가진 입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조금 황당하기도 한 이 주장은 당시 과학계의 거장인 로버트 후크에 의해 공개적으로 반박 당했다. 그 이후 뉴턴은 후크가 죽을 때까지 빛과 색채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결국 250년이 지난 뒤 아인슈타인이 빛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며, 본질은 입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알쏭달쏭한 이론으로 빛에 대한 논쟁은 종결됐다.
과학적으로는 빛이 물체에 닿았을 때 어떤 파장을 흡수하고 어떤 파장을 반사하는가에 따라 물체의 색깔이 정해진다. 그러니까 색채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채를 감지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똑같은 붉은색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색깔은 또 상대적이다. 붉은색이 검정색에 둘러싸여 있으면 선명한 빨강색으로 느껴지는 반면, 파란색에 둘러싸여 있으면 검붉은 장미 빛으로 느껴진다. 이를 처음 이론화한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독일의 낭만주의시대 문학가 괴테다. 실제로 괴테는 자신이 공들여 연구, 발표한 ‘색채론’을 가장 자랑스러워 했다. 지금 다시 괴테의 색채론을 꺼내 읽어보면 괴테가 잘못 이해했거나 해석한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되나, 뉴톤의 과학적 분석에 의문을 가지고 반대 입장에서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색채이론을 발전시킨 용기와 애정은 대단하다. 특히 색채에 대한 그의 이론은 미술에서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색을 섞으면 어떻게 될까? 붉은색 페인트와 파란색 페인트를 섞으면 보라색 페인트가 된다. 다른 색깔 페인트를 계속 섞으면 탁해지다가 결국 검정색으로 변한다. 화학적 반응의 결과다. 빛을 섞으면 어떻게 될까? 붉은빛과 파란빛을 섞으면 핑크빛이 된다. 다른 색깔 빛을 계속 섞으면 점점 맑아지다가 결국 하얀색 빛이 된다. 광학적 반응의 결과다. 문화적으로 흰색은 평화와 평등, 관용,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가치관, 즉 다양한 색깔을 지닌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들을 단순히 화학적으로 섞어 놓으면 탁한 검정색이 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노래하듯 “검정은 절망의 색”이다. 반면 서로 다른 개인과 집단이 빛의 입자로 작동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입자가 많을수록, 색깔이 다양할수록 밝고 하얗게 빛난다. 뉴턴의 광학 법칙은 다양한 색깔을 지닌 입자들로 구성된 사회가 밝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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