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임승천 개인전
자본·권력에 순응하는 현대인의 무력감 스토리입힌 작품으로 고발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네 편의 상황극 보는 듯
“작품이 무섭다, 우울하다는 말을 들어요.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 않잖아요? 비루한 현실에 따뜻한 미담을 섞어 작품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있지만.”
조각가 임승천(41)은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인다. 성곡미술관에서 ‘네 가지 언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 중이다. 실종, 노시보, 고리, 순환의 네 가지 키워드로 구성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아닌 게 아니라 어둡다. 겁에 질린 표정의 벌거벗은 여자, 한 눈을 가린 채 몸이 굳어버린 거인, 꼭 쥔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헐떡대는 물고기, 발목이 끈으로 묶인 채 표류하는 인물 군상, 칼에 벤 듯 등에 깊은 상처를 지닌 세 눈박이 소년, 신나게 팽팽 돌지만 무시무시해 보이는 사단 케이크 모양의 기괴한 장치.
작가는 네 개의 전시실에 각기 다른 상황극을 연출했다. 예컨대 노시보 효과(해롭다는 암시나 믿음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효과)를 모티프로 전개한 제2 전시실은 언어의 폭력을 고발하는 잔혹극의 현장이다. 여인의 거짓말이 거인을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시장 벽에 적혀 있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는 일종의 안내지만, 관객이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나머지 전시실도 사연이 있다. 소년은 왜 등이 갈라졌는지, 물고기는 왜 구석에 처박힌 채 옴쭉달싹 못하는지, 핏방울을 쥔 소녀는 왜 파란 비옷을 입고 있는지, 사단 케이크에서 벌어지는 쇼는 무엇인지 상상하고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허구의 시나리오를 통해 세상의 병리적 징후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특정 집단의 이익,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일방통행식 시스템의 폭력과 거기에 순응하는 현대인의 무력감을 주로 표현해 왔다.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넣고 싶었지만, 아이들도 보는 미술관 전시라 참았다”고 한다.
문제의식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 것은 제 4전시실의 마지막 작품 ‘순환’이다. 서커스 공연을 연상시키는 분홍 천막 안에서 케이크 모양의 설치물이 1초에 18회 회전한다. 맨 위에는 청ㆍ황ㆍ백색 깃발을 번갈아 흔드는 지배자들이 있다. 그 밑에 눈과 입을 놀리며 감시하는 관리자들, 그 아래로 명품 브랜드 벽 앞에서 캉캉 춤을 추는 향유자들, 맨 밑에는 망치로 벽을 치는 파괴자들이 있다. 빠른 회전으로 잔상을 만들어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이 작품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고발이다.
제 1전시실과 제 3전시실에서 만나는 발이 묶인 표류자들은 대열에서 낙오될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머리는 그릇 모양으로 위가 잘렸고 저마다 네 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그릇 크기와 얼굴 표정이 제각각이다.
눈이 세 개인 소년의 이름은 ‘낙타’, 작가의 예전 전시에서 뱃머리가 세 개인 배가 침몰할 때 혼자 살아남은 이방인이다. 그의 등에 깊게 갈라진 틈은 날개가 있던 자리다. 낙타의 항해와 날개를 잃어버린 사연을 알지 못해도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진지한 작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7월 27일까지 한다. 미술관이 마련한 작가와의 대화는 6월 21일과 7월 19일 일정이 남아 있다. (02)737-7650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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