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ㆍ전새롬 옮김 아르테 발행ㆍ384쪽ㆍ1만4,000원 순수의>
일본 소설가 사쿠라기 시노(49)는 서른 일곱에야 등단한 늦깎이 작가다. 법원 타이피스트로 일하다 결혼 후에는 전업주부로 살았다. 나고 자라 지금껏 살고 있는 홋카이도만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그는 “사람만으로는 소설이 완성되지 않고, 풍경만으로도 소설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의 첫 장편 <순수의 영역>은 ‘홋카이도적인 슬픔’이라고 불러도 좋을 서늘하고 고독한 마음의 진동이 넓은 파장을 그린다. 지나치게 정적인 이 소설이 지루할 새 없이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은 내면의 운동을 밀착해 그려내는 섬세한 필치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입신에 성공하지 못한 서예가 류세이와 고교 보건교사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 레이코다. 지역사회에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류세이를 서예가의 길로 이끌었던 어머니는 치매에 반신불수로, 아내에게 기대 살아가야 하는 류세이에게 이중의 짐이 된다.
소설은 류세이가 첫 전시회를 연 시립도서관의 젊고 유능한 관장 노부키와 발달장애를 지닌 그의 여동생 준카를 류세이 부부와 엮으면서 묘한 질투의 자기장을 형성한다. 서예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그 재능이 대작의 위조에 머물러있는 순진무구한 준카는, 틀에 갇혀 재능의 한계를 절감하는 류세이에게 청신한 자극이 되고 준카를 매개로 만나게 된 노부키와 레이코는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갖게 된다.
소설은 화끈한 불륜의 서사로 정념을 폭발시키는 대신 질투의 동력학을 세밀하게 좇는 데 주력한다. 여기서 질투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감정뿐 아니라 점화되지 않는 싸늘한 마음까지 아우른다. 준카의 죽음 앞에 자아를 잃을 정도로 오열하는 남편을 보고 레이코는 생각한다. “질투심이 없다는 게 이토록 슬픈 일인 줄 몰랐다. 인간으로서 뭔가 소중한 게 누락되어 있다.”
여기에 재능에 대한 질투, 부부간 경제력 차이에 따른 열등감, 오래된 연애에 결말을 짓지 못하는 비겁함과 구차함, 노모 간병으로 황폐해진 삶의 피로 등 복잡한 심리들이 교직하는데 섬뜩할 정도로 서글픈 삶의 비애는 주로 이 부가적 감정들에 의해 촉발된다.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독자의 감성을 베는 서스펜스가 군데군데 빼어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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