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진, 국제바둑연맹 사무국장으로 제2의 바둑 인생
다음달 6일부터 9일까지 경북 경주에서 제35회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가 열린다. 국제바둑연맹(IGF)이 주최하는 이 대회는 한국의 위태웅 아마7단을 비롯, 전세계 55개국 선수들이 참가해 기량을 겨루는 세계 바둑인들의 최대 축제다.
IGF가 주최하는 세계바둑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IGF는 1982년 일본이 주도해 창설한 세계 최대 바둑단체로 현재 회원이 74개국에 이른다. 그 동안 일본인이 회장을 도맡아 세계선수권대회도 항상 일본에서만 열렸다. 그러나 세계 바둑계에서 점차 일본의 위상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입김이 강해짐에 따라 2010년부터 한중일 3개국이 돌아가면서 회장국을 맡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14~15년에는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가 IGF회장을 맡게 돼 올해 세계선수권대회를 한민족 문화유산의 보고인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개최키로 한 것이다.
이 대회의 실무총책임자가 바로 IGF 신임 사무국장 내정자인 여자프로기사 이하진 3단(26)이다. 대회 개막 전날 열리는 IGF 총회에서 홍석현 총재가 신임 회장에 취임하면 곧바로 공식 업무를 시작한다.
“어렸을 때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 바둑과 관련된 국제기구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기구가 실제로 얼마나 있는지, 또 거기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여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지워졌지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현실이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대전이 고향인 이하진은 여섯 살 때 처음 바둑을 배웠다. 제법 기재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홀로 서울로 올라와 차수권 8단 집에 기숙하면서 바둑 공부를 해 드디어 2004년 프로의 꿈을 이뤘다. 2008년 전자랜드배 여자부서 우승했고 2009년에는 여류국수전에서 준우승을 했다.
힘들었던 프로기사 세계
박지은·조혜연 등 너무 막강
고등학교 졸업 때 회의 느껴 일반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자신의 미래에 대해 회의가 생겼다. 당시 루이나이웨이, 박지은, 조혜연의 위세가 너무 막강해 아무래도 승부사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판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래서 승부를 떠나 일반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고향 대전으로 내려가 대입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땄지만 학교 공부를 전혀 안 해서 수학이 완전 깡통이었다.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새로 시작했다. 다행히 바둑에서 키워진 집중력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몇 개월 만에 고교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고교 시절 한상대 교수가 개설한 바둑영어교실에 나가 열심히 공부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인생에 변화를 준 영어
바둑 집중력 공부에 큰 도움
영어로 대학 수석 졸업하자 한국기원서 뜻밖의 연락 와
이하진이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건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린 한국대사배 바둑대회에 다녀온 뒤부터다.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외국 바둑인들의 진지한 대국 모습이나 바둑에 대한 열정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앞으로 보다 넒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선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바로 ‘한상대 영어스쿨’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멤버가 현재 호주에서 바둑보급을 하고 있는 안영길과 독일의 윤영선 등이다.
“바둑 공부할 때처럼 독하게 공부했더니 영어도 금방 늘던데요.” 뛰어난 영어 실력은 이후 이하진의 인생 항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고교 졸업 2년 후인 2010년 22살 때 영어우수자 특별전형을 통해 우송대 솔브릿지국제경영대에 입학했고,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이 대학에서 항상 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전체 수석으로 7학기 만에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영어 실력 덕이다.
하지만 이미 바둑과는 거의 인연이 끊긴 상태였다. 대학 재학 중 시합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니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랬으면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아갔겠죠.”
그런데 이하진이 바둑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기적처럼 바둑이 또 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졸업을 몇 달 앞둔 지난해 4월 한국기원으로부터 뜻밖의 전화 연락이 왔다. IGF사무국장 면접에 참여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의였다. 당시만 해도 IGF사무국장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면서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음에 서울로 올라와 한국기원으로 달려갔고 결국 면접을 무사히 통과해 바둑행정가이자 세계바둑외교의 첨병으로서 제2의 바둑 인생을 시작했다.
이하진은 지난해 4월 IGF사무국장 내정자로 선정된 후 이미 여러 차례 각종 국제회의와 세계대회에 참가해 바둑행정과 외교 업무에 대한 실무 경험을 착실히 쌓았다. 지난해 7월 폴란드에서 열린 유럽바둑콩그레스를 시작으로 8월에 일본 센다이서 열린 34회 세계바둑선수권대회와 IGF총회, 11월 일본 페어대회, 12월 베이징 스포츠어코드대회를 잇달아 참관했고, 올 들어서도 필리핀 OCA 총회 참석 및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주요국 바둑협회 방문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인맥을 넓혔다.
경주 세계아마대회 지휘
26세 처녀기사가 중책 맡아 주변에서 걱정·우려의 시선
"공부만큼 하면 못할 게 없죠"
요즘 이하진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경주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대회는 IGF사무국장으로서 치르는 첫 행사다. 완벽한 대회 진행을 위해 매일 한국기원에 출근해 대회장 준비 상황 점검은 물론 각국 바둑협회 임원들과 선수들의 대회 참가신청 접수현황 파악에서부터 대회 입상자에 수여할 상장과 상패 제작까지 크고 작은 일들을 챙기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 이밖에 대회 기간 중 열리는 IGF총회와 이사회에 앞서 각국 바둑협회 간의 의견 조율도 모두 사무국장 몫이다.
아직도 주위에서는 26세 처녀기사가 세계 최대 바둑단체 실무책임자라는 중책을 맡게 된 데 대해 걱정과 우려의 시선이 없지 않지만 정작 이하진은 “한 번도 안 해 본 일이라 좀 낯설긴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며 “바둑 공부할 때처럼 열심히 하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바둑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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