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북쪽의 사람은 소림파를 숭상하고 남쪽의 사람은 무당파를 존경한다(北崇少林 南尊武當)’. 무협지깨나 읽었다면 소림파와 함께 중국 무술 양대 산맥을 이룬다는 무당파 세 글자에 눈이 반갑다. 영화 ‘의천도룡기’에서 이연걸(장무기 역)이 몸담은 문파다. 검과 태극권을 신봉하는 무당파의 본산이 이름 그대로 우당산(武當山)이다. 소림파가 불교에 근원을 둔 문파라면 무당파는 도교에서 발원했다. 자연스레 중국 허베이성(湖北省) 쓰옌시(十堰市) 우당산은 도교의 명산이기도 하다. 태권도 단증 하나 없는 남자가 무림의 산에 올랐다.
<고건축군의 유네스코문화유산 지정>
“강원도 언저리 산이라 해도 구분 못할 거 같은데.” 까마득한 산봉우리, 그윽한 뭉게구름, 아찔한 기암괴석을 기대했던가. 그런 건 없다. 무술의 산이라 해서 웅장하지 않다. 눈이 즐겁기 위해 산을 오른다면 정상에서 마주해야 하는 건 실망감이다. 72개의 봉우리 중 으뜸이라는 톈주봉(天柱峯)은 해발 1,612m. 제주 한라산(1,950m)보다 낮다. 한국인이 즐겨 찾는다는 황산만큼 절경이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다. ‘대륙 느낌’ 물씬 받고 싶다면 일찌감치 이정표를 수정하는 게 낫다. 다소 불편한 접근성 치고 산은 평범하다. 우당산에 오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무술에 흥미가 있거나, ‘도(道)’에 관심이 있거나. 방점은 산 자체가 아닌 자락 곳곳에서 세월을 지탱한 도교 사원들, 그곳의 이야기에 찍혀야 한다. 오래된 건물의 나이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1994년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자연이 아닌 문화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우당‘산’이 아니라 ‘우당’산이다.
<영락제의 자금성, 장삼봉의 태극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처음부터 끝까지 인력으로만 가는 방법. ‘신의 길(神道)’이라 불리는 돌계단이 산 밑동부터 시작된다. 선대 도인들의 발자취가 남았을 돌의 행렬이 지금껏 인간의 하중을 버티는 중이다. 문명의 도움을 받아 품을 줄일 수도 있다. 방문객 대부분은 산 초입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입산료 140위안에 버스 요금 100위안이 더해진다. 버스로는 산의 7부 능선까지 이동할 수 있다. 옛적 우당산 도인들이야 경공술로 산등성이를 훅훅 날아오른다지만 현대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170위안만 있으면 도인 못지않은 축지법을 쓸 수 있다. 붉은색 케이블카가 눈 깜짝할 새 정상 어귀로 방문객을 날라다 준다. 21세기 근두운에서 내리면 타이허궁에 이른다. 톈주봉으로 가는 관문이다.
타이허궁의 적갈색 돌담과 진한 비취색 기와 사이사이로 향 연기가 퍼진다. 사료에 따르면 이곳의 향불은 당(唐)대부터 타올랐다고 한다. 원(元)나라 때 다수의 건물이 파괴됐고 현재 남아있는 고건축물 대부분은 명(明) 영락제 시절 축조된 것들이다. 우당산 도교의 전성기다. 영락제는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수년간의 내전 끝에 조카 건문제를 베고서야 즉위한 비운의 황제다. 대륙판 수양대군이 천하의 인심을 얻으려 택한 것이 도교였다. 도교의 신 진무대제가 황제의 자리를 점지했다고 그는 만천하에 공표했다. 황제는 신전이 필요했다. 인부 30만명이 12년간 톈주봉 둘레에 자금성을 쌓았다. 수백년이 지나도록 황실의 가묘를 지키는 자금성은 거무튀튀한 돌담이다. 북경의 그것과 이름만 같을 뿐 화려함이라곤 전혀 없다. 본래 이곳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는지 산과 어그러짐이 없다. 도교스럽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이곳 우당산에 오면 저절로 감화될 것이오.” 영락제 훨씬 이전에도 우당산 정기를 알아본 긴 수염의 남자가 있었다. 검의 신으로 추앙받는 무당파의 시조 장삼봉이다. 김용의 ‘영웅문’ ‘의천도룡기’ 등 유수의 무협지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정사와 야사를 넘나드는 존재라 태어난 곳도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우당산에서 백세 넘도록 도에 정진했다고 알려졌다. 장삼봉을 거론하며 태극권을 빼놓기 어렵다. 태극권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 중 유력한 하나가 장삼봉이 우당산에서 창시했다는 것이다. 13억 중국인의 국민체조가 바로 이 산에서 시작됐다는 얘기다. 대륙의 하고많은 산 중에 왜 이곳이었을까. 우당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중국 최대의 도금 건물, 금전>
타이허궁에서 정상까지 이르는 자금성 둘레길은 무릎이 고생해 줘야 한다. 산 좀 탄다고 하는 이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돌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파르고 좁디좁다. 꼭 성인 한명이 지나갈 수 있는 폭이다. 앞사람이 산의 정취에 취해, 혹은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잠깐이나마 쉴라치면 뒷사람은 이를 감내해야 한다. 자의적 타의적 휴식시간이 계단 곳곳에서 주어진다. 자연스레 등정시간은 고무줄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 계단 개수 세기를 포기할 무렵 톈주봉 정수리에 이른다. 정상에 첫발을 내딛으면 금색 기와 건물 한 채가 우두커니 서 있다. 금전(金殿)이다. 소박한 규모에 ‘생각보다는...’하고 탄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야사에 따르면 베이징에서 만들어져 우당산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이름은 금전이지만 도금 건물이다. 사원 외벽에 120톤의 구리와 300kg의 황금이 사용됐다. 중국의 구리 건축물로는 최대라고 알려졌다. 우당산에 있는 대개의 사원이 그렇듯 금전 내부에는 진무대제 상이 봉안돼 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경건히 엎드리고 합장한다. 산 아래서부터 품어온 각자의 사연을 신 앞에서 쏟아낸다. 가족 건강을 위한 기도가, 삶의 고단함에 대한 토로가 산 정상에서 응축된다.
돌난간에 기대어 산을 가만히 내려다보면 창공이 희뿌옇다. 운무를 끼고서 첩첩이 산이 끝없이 퍼져나간다. 까마득한 골짜기 사이로는 방금 발을 뗐던 돌계단이, 사원들이 버티고 있다. 원래 그 자리였다는 듯 다들 자연스럽다. 진무대제가 득도해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난옌궁(南岩宮)은 절벽 중턱에 음각된 듯 자리 잡았다. 가파른 절벽의 도교 사원. 그 원경은 이곳의 몇 안 되는 볼거리 중 하나지만 장대한 것은 아니다. 자연 속에서 오만하지 않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산세에 몸을 맡긴 사원은 장구한 세월 동안 무위자연을 깨달은 듯해 보였다.
<우당산의 도인들>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200명 가량의 도인이 우당산에서 기거 중이라 알려졌다. 태극 음양의 원리를 깨치기 위한 정진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흰 도포자락의 무술인을 만나려면 위쉬궁이나 쯔샤궁으로 가야 한다. 쯔샤궁은 우당산 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궁의 너른 광장에는 태극권에 심취한 정통 수련가들이 자웅을 겨룬다. 바로 이곳에서 ‘우당태극권연의대회’라는 무술대회가 2년마다 열리기 때문이다. 중국을 넘어 해외 각지에서 무술 좀 연마했다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전해진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는 말로 설명되거나 글로 개념화될 수 없다. 도를 품은 산도 그랬다. 팔괘의 하늘과 바람을 이고 사는 땅의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우당산을 위한 마뜩한 수식어 하나 찾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왔다.
쓰옌(중국)=장재진기자 blanc@hk.co.kr
[여행수첩]
●인천에서 허베이성 우한까지 대한항공(수ㆍ금ㆍ일), 중국남방항공(월ㆍ목ㆍ토)이 매주 3회 운항한다. 우한시에서 우당산이 있는 스옌시까지는 440㎞ 거리다. 기차로 갈 경우 우당산역에서 내리면 된다. 우당산공항이 내년에 완공돼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8개 도시에서 국내선이 운항할 예정이다.
●허베이성은 대부분 평야지대다. 바람이 불지 않아 여름에 덥다. 기온 40℃까지 오르니 주의할 것.
●우당산 지역은 도교 정진요리가 발달했다. 버섯과 콩을 주 재료로 한 것으로, 타이허궁이나 쯔샤궁에서 맛볼 수 있다. 우당산 곳곳에서 가시연 열매를 빻아 만든 떡을 볼 수 있다. 허기진 등산객에게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은 ‘2014 중국 스마트 관광의 해’를 맞이해 세계유산을 주제로 한 모바일 웹(m.cnta.kr)을 선보였다. 모바일 웹은 우당산을 포함, 중국의 45개 세계유산의 위치와 관광정보 등을 안내한다. (02)773-0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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