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설정에 무리도 있었지만
가능성 있는 일이라며
스스로 최면 걸어 집중
코믹한 역할로 돌아오고 싶어"
“이보다 더 센 악역이 있을까요?”
만삭의 옛 애인을 길거리에 버려둔 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여동생이 진실을 파헤치지 못하게 협박하고 납치하는 것도 모자라 그 가족의 생계 수단마저 앗아간 파렴치한 캐릭터가 있다. 2일 막을 내린 KBS 2TV 저녁 일일극 ‘천상여자’의 장태정이다.
이 역할에 5개월여 동안 빠져 지낸 배우 박정철(38)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간 내면의 추악함을 이렇게까지 보여준 작품은 없을 것”이라고 말문을 열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상식적인 악역이 아니라 악행이란 악행은 다 하는, 너무 센 역할이었다”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천상여자’는 수녀였던 이선유(윤소이)가, 결혼을 약속한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재벌가의 사위가 된 장태정(박정철)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장태정의 극악무도한 행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막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박정철은 ‘천상여자’가 막장 드라마라는 지적에 정색하며 반박하지는 않았다. “제 스스로도 ‘극의 설정에 무리수가 있겠구나’ 생각은 합니다. 매회 장태정이 음모를 꾸미는 등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에 감정선이 자연스럽지 않았죠. 늘 위태로운 설정 속에서 연기를 하다 보니 편안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대본을 믿고 ‘가능성이 있는 일이야’라고 최면을 걸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의구심을 갖고 대본에 물음표를 달면 한도 끝도 없다”며 “세상에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지 않느냐”고 웃었다.
‘천상여자’는 시청률 18%대로 끝을 맺으며 전작 ‘루비반지’에 이어 KBS 2TV의 오후 8시대 일일극 자리를 굳건히 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라는 꼬리표는 떼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박정철은 “막장 드라마라는 게 좋은 뜻은 아니어서 듣기 불편하다”고 했다.
‘천상여자’는 장태정이 옛 애인의 혼령을 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맺어 마지막을 권선징악으로 포장했다. 기존 막장 드라마의 결말 패턴을 답습한 결과다. 막장 드라마는 악행을 저지른 주인공이 대개 참회하고 벌을 받거나 사고를 당해 죽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정신이상자로 병원에서 요양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박정철은 “최종회에서 장태정이 참회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라며 “부러지지 않고 포기를 모르는 캐릭터가 한 순간에 쉽게 무너지는 것에 헛헛한 웃음을 짓는 시청자가 많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럼에도 ‘천상여자’는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모그래피가 될 듯 하다. 연기에 대한 재평가를 받는 계기가 됐고 연기 스펙트럼도 넓혔기 때문이다.
“계속 분노를 표현하다 보니 한계에 부딪혀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죠. 고통스럽게 열심히 한 작품입니다. 모든 것을 쏟아내 후련한 마음도 있어요. 어떤 역할이든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된 거죠. 확실한 건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다음 작품에서도 악역을 할 거냐고. 그는 “이보다 악한 역할은 다시 없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매일 미간을 찌푸리는 악역을 했으니 다음에는 코믹 역할로 웃고 싶다”며 바람을 전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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