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푸틴 방일 앞두고
쿠릴열도 교섭 사전 포석용
미국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 문제와 관련 미국이 해외 여행금지 대상으로 지정한 인물을 도쿄로 초청했다. 납북 피해자 재조사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인 대북 제재를 선언한 데 이어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반환교섭을 위해 러시아와 손잡는 모양새를 취해, 굳건했던 미일공조에 금이 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4일부터 시작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2일 일본을 방문한 세리게이 나리슈킨 러시아 하원 의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으로, 도쿄에서 열리는 연례 러시아 문화 소개 행사의 개막식 참석차 4일까지 머무를 예정이다.
나리슈킨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과 관련, 서방으로부터 자산동결 및 여행금지 대상으로 지정된 45명중 한 명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도 나리슈킨의 방일은 전격 허용했다. 대러시아 제재와 관련, 일본측이 자체적으로 입국금지 대상으로 정한 러시아측 인사 23명의 명단에 나리슈킨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정부 차원에서 나리슈킨 의장을 초대한 것은 아니며, 정부 당국자가 접촉할 계획도 없다”며 민간 차원의 방일임을 강조했다.
반면 나리슈킨의 일본내 행보는 정치일색이었다. 나리슈킨 의장은 2일 도쿄도내에서 열린 문화행사서 “상호 신뢰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고, 아베 총리의 측근인 세코 히로시게 관방부장관은 “러일 양국민의 새로운 상호 이해와 교류가 진행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는 아베 총리의 답사를 대독했다.
이부키 분메이 중의원 의장,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이 잇따라 나리슈킨과 만나 아베 총리의 대러 외교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나리슈킨을 극진 대접하는 배경에는 푸틴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이 있는 그를 이용, 북방영토 교섭을 쉽게 풀어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부총리, 대통령행정실장 등을 거친 나리슈킨은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측근이라는 점에서 일본이 특별히 공을 들여온 인물이다. 아베 총리는 4월 러시아 방문시 북방영토 교섭을 재기하기로 합의했고, 올 가을 푸틴 대통령의 공식 방일도 예정돼있다.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에 일본이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푸틴 대통령은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을 할 생각이 있느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베 총리로서는 나리슈킨의 방일에 최대한 배려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서 푸틴 대통령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나리슈킨 의장은 이에 화답하듯 3일 NHK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방영토 문제를) 협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은 국익을 존중해가며 보다 자립적인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 북방영토 교섭을 일본의 대러시아 제재 대열 이탈과 결부할 뜻을 내비쳤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러시아 포위망 구축에 전념하던 미국의 심기는 불편하다. 최근 일본을 방문한 미 정부 관계자는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 장관의 4월 러시아 방문이 취소된 것도 미국의 반발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정부 요원 파견을 추진했으나 “대통령 방일시기에 행동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는 미국의 항의를 받고 취소하기도 했다.
아사히 신문은 “아베 정권이 나리슈킨 의장의 방일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향후 미일 신뢰관계가 한층 어색해질 수 있다”고 전했다. 관련 전문가는 “4일부터 시작되는 G7정상회담서 대러시아 제재에 일본이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말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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