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왕족 출신인데 당시 역사책 기록 없어" 中학계 일각 의혹 제기
"왕 비판해 기록 못 남겨" 분서갱유 때 소실 반박도
2일 단오절(음력 5월5일)을 맞아 중국에서 굴원(屈原ㆍ그림)이 후대에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란 논란이 일고 있다.
신화망(新華網)은 이날 굴원이 실재했던 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나라 때인 BC 90년 쯤 완성된 역사책 사기(史記)에는 굴원이 BC 300년을 전후로 한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이자 시인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초나라의 역사책에서는 굴원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선 “왕족 출신으로 고위직을 지낸 굴원이 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후대의 필요에 따라 창조된 가공의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왕에게 충성을 다하다 간신들의 참언으로 쫓겨난 뒤 나라를 걱정하다 음력 5월5일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숨졌다는 굴원의 고사는 물론 25편의 작품도 모두 후대에 충성을 장려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궈젠쉰(郭建勳) 후난(湖南)대 교수는 “당시 역사책에서 굴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굴원의 작품이 왕을 직접 비판해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있었던 기록도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당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증거도 없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선 단오절에 굴원의 시신이 물고기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고기 밥으로 쭝쯔(찹쌀을 대나무 잎에 싸서 삼각형으로 묶은 후 찐 음식)를 만들고,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용선(龍船)을 띄워 시합을 하는 풍습이 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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