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창 정치부기자 hermeet@hk.co.kr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한 인간의 실존적 무게가 얼마나 큰 지, 또 그런 인간들의 만남과 헤어짐에 담긴 인연의 깊이가 실로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를 담은 이 구절이, 요즘의 인사쇄신 정국에서도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면 견강부회가 될까.
당장 안대희 전 대법관의 총리 후보 낙마 사태만 봐도 그렇다. 안 전 대법관의 과거 경력만 보면 세월호 정국을 수습할 국무총리 적임자로 손색 없다. 하지만 대법관 퇴직 후 거액의 수익을 올리는 변호사로 변신한 그의 현재가 알려졌을 때, 청렴한 것으로 알려졌던 그의 일생은 도전 받았다. 그는 “30년 넘는 공직 생활 동안 많지 않은 소득으로 낡은 집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어느 정도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한 측면도 있었다”고 해명했으나, 월 3억 가까운 수익이 대검 중수부장, 대법관 등으로 이어진 공직의 보상이라는 데 공감할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가 올린 수입이 대법관 경력 퇴직자에겐 관행적 수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이들 모두가 관행의 공범자였다. 선주, 선장, 선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해수부, 해경, 해운조합 등 제각각 관행의 쳇바퀴 아래 있었다. 그를 추천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과거만 보였겠지만, 국민들에겐 그의 현재까지 포함한 일생이 다가온 것이었다.
인적 쇄신 정국에서 또 다른 논란의 주인공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여권 일각에서도 사퇴 요구가 잇따르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까지 김 실장을 교체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청와대 주변에선 “측근인 국정원장과 안보실장까지 경질한 마당에 곁에 일 할 사람은 남겨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적지 않다. 내각 검찰 당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 속에서 국정 현안 전반을 꿰차고 있는 김 실장을 대체할 만한 이가 없다는 얘기도 많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눈에는 김 실장의 탁월한 업무 능력 외에 다른 평가는 부차적 요소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김 실장은 ‘세월호 이전’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가 남이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간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식 또는 일방통행으로 비판 받았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이로 김 실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등장으로 내각과 검찰의 ‘군기’가 확실히 잡혔을지 모르지만, 청와대 눈치만 보는 받아쓰기 내각이 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최근 분담형 책임행정을 통해 국정 운영 변화를 꾀하려는 것도 이런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는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태에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의 사과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는 책임행정에 앞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공감의 정치’라는 뜻이다. 나와 다른 처지에 있거나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더라도, 그 얘기에 공명하고 호흡하면서 함께 살 길을 찾는 것이 지금 같은 심리적 재난 시대에 맞는 정치가 아닐까. “가만 있으라”는 윽박 대신, 구멍조끼를 나눠주고 손을 잡아주는 리더십 말이다.
이 공감의 리더십 대척 점에 있는 것이 마이웨이식 리더십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관이 검찰과 국정원일 것이다. 국민에게 다가오는 김 실장의 일생은 그런 구시대적 통치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김 실장에 대한 사퇴 요구는 그러므로 한 시대와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박 대통령이 정말 60년 적폐를 깨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과감한 시대적 도약이 필요하다.
정현종의 시를 이렇게 바꿔보자. “사람이 간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시대가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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