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오직 홀로 있을 때에만 우린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고독은 결코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최대의 도전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우연히 다시 읽은 이 문장이 그렇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농담과 헛소리가 그 동안 잊고 있던 무엇인가를 무의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이 문장은 오랫동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독이란 낱말이 너무나 생경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혼자 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이 물음은 홀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을 홀로 있음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어느 정도 분리된 사적 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 설령 세상을 등진 은자의 삶을 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있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물론 혼자 있을 수 있다. 혼자 극장에 가서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도 있고,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곳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쓴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사실은 어디를 가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지금 혼자 있어?” 라고 전화로 묻는 친구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내밀한 통화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홀로 있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모든 것을 모든 것과 연결시키는 디지털 매체의 출현으로 고독의 의미는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고독이라는 단어가 골동품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고독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찾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희귀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어떻게 하면 ‘잘 연결될 수 있을까’에 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SNS 알림 음을 들으면 세상에는 알리고 싶은 것도 많고, 들어야 할 것도 엄청 많은 것처럼 보인다.
‘연결의 광기’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연결되고 싶어 한다.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 카페에 가면서 경험한 어떤 사건, 눈에 들어온 낯선 사물... 이처럼 사소한 모든 일들을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에 올리면서 사람들은 세상과 연결돼 있다고 자위한다. 혼자 있지만 결코 홀로 있지 않다는 자위의 쾌감은 사회의 그물망을 더욱 더 촘촘하게 엮어 놓는다. 우리가 집에 혼자 있을 때에도 휴대폰과 인터넷은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네트워킹(networking), 즉 사회적 관계의 그물짜기가 일상이 돼버린 디지털 시대에 고독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사실 고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대한 공포가 만연한 우리시대에 우리는 홀로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일까? 휴대폰이 마치 우리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고독의 유용성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통, 융합, 통섭과 같은 이 시대의 유행어들은 모두 연결의 창의성과 유용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연결돼야 한다. 이렇게 사회적 연결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고독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런데 너무 편안하면 나태해진다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지 않을까? 습관처럼 반복되는 행위에 생각이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좀처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꼭 같이 일상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고독’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기 위해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여유와 자유를 위해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는 고독을 인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기에 더욱 더 쇼펜하우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사람들을 사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고독을 견뎌낼 수 없는 무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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