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글 말살에 혈안이던 1943년 간송 전형필은 경성제대 교수인 김태준으로부터 훈민정음의 존재를 전해 듣고 구입을 결심했다. 가격 흥정이 벌어졌다. 김태준은 조심스럽게 “소유주가 1,000원을 달랍니다”고 운을 뗐다. 기와집 한 채 값이다. 간송은 “그런 귀한 보물은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라며 1만원을 건넸다. 요즘 서울의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30억원 이상이다. 간송은 피난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렇게 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글 창제 3년 후인 1446년 발간된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사용법을 설명한 해설서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제작자가 알려진 유일한 글이 한글인데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서양에서도 구텐베르크 성서 외에 500년 이상 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 2008년 경북 상주의 골동품상인 배모씨가 또 다른 해례본을 공개해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간송본과 구별해 상주본으로 명명된 이 책은 보존 상태가 좋고 세세한 주석까지 달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 전문가들은 상주본이 1조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문제는 상주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배씨가 책을 공개하자 골동품상인 조모씨가 자신의 점포에서 훔쳐간 것이라며 소송을 냈다.
▦ 대법원이 29일 배씨의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배씨는 “무죄가 확정되면 실물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무죄 판결이 나자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앞서 검찰은 배씨 자택 압수수색을 벌였으나 해례본을 찾지 못했다. 배씨는 “낱장씩 봉투에 담아 잘 숨겨뒀다”고 지인에게 말한 바 있다. 이미 해외에 반출됐다는 설도 있다. 사재를 털어 민족의 유산을 지키려 한 간송과 소유권만 주장하며 은닉 장소도 밝히지 않는 배씨의 행동은 너무도 대비된다. 간송본과 상주본이 나란히 전시될 날이 기다려진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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