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 인문학자
대학에 있을 때 매 학기마다 한 끼 굶고 그 돈으로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기부하도록 하는 과제를 내줬다. 고작 몇 천 원이지만 학생들은 그 과정을 통해 기부와 공감, 그리고 연대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며 그 이후에도 꾸준히 기부하게 되었다고 행복해했다. 기부나 자선이 최고의 최선의 중독이라는 건 아마도 그런 가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부의 참 뜻과 가치는 바로 자신이 먼저 행복해졌다는 사실에 있다.
작년 워런 버핏은 빌앤드멜린다게이츠 재단에 20억 달러를 기부했다. 해마다 그는 같은 재단에 꾸준히 기부해왔고 2008년에는 18억 달러를 기부했다. 그는 다른 여러 재단에도 거액을 기부해왔다. 특이한 것은 그 자신도 전부인과 함께 40년 전에 수전톰슨버핏 재단을 세웠고 지속적으로 기부했지만, 그 규모가 게이츠 재단 기부액의 10분의 1쯤 된다는 점이다. 왜 그는 거액을 자기 재단이 아니고 다른 재단에 기부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혹시라도 개입하고 간섭할까 싶어 그랬을 것이다. 청계재단이나 재벌들의 재단과 확연히 대조된다.
어느 대학의 교수가 총장이 되면서 경영합리화를 내세우던(그 이후 각 대학은 경쟁적으로 건물 짓는 데에 혈안이었고 금세 토건판으로 변했다!) 시기에 기부입학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 이전부터 기부입학 문제는 존재했지만, 그 시기에 본격적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다. 등록금 걱정으로 공부에 몰두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하겠다는 갸륵한(?) 의도를 내세웠다. 그러나 예민한 감정의 문제들까지 거론되면서 갑론을박 논쟁만 벌이고 아무 소득 없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요즘은 뜸하다. 자신들의 참뜻을 ‘미개한’ 시민이 몰라줘서 재론하는 걸 꺼려선지, 등록금이 높아야 대학의 ‘품위’가 높아진다고 여기는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해괴한 건 그 기부라는 게 지속적으로 해온 것이 아니라 제 자식 입학할 때만 기부하는,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의 야바위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은 외면하고, 매년 똑같은 노래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대학조차 제대로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설득하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해결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결국 그들도 부자들의 주머니에 기대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5년이나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기부해온 사람들에게만 자격을 주겠다거나 했다면 반발은 줄었을 것이고, 오히려 새로운 기부문화의 틀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학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돈에만 눈길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 입학할 때만 돈 지르겠다는 부모나 그걸 받겠다는 대학이나 도토리 키재기다.
총리에 지명된 이가 전관예우의 나쁜 관행 덕인지 짧은 기간에 큰돈을 벌었다고 해서 시끄럽더니 뜬금없이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겠다고 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총리 직에서 사퇴했다. 기부를 탓할 생각은 없다. 기부란 꾸준히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의미를 갖는다. 돈의 많고 적음이 주제가 아니다. 돈이 아니라 재능을 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력 덕을 보았을 것이라 짐작되는 상당한 소득을 얻었고, 지명 전후에 갑자기 의로운 사람인 양 거액의 기부를 발표했다.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도 고쳐 매지 말라는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기부는 돈의 부피와 무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기부에 대한 모욕이다. 기부는 드러내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데서 값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공감과 연대의 의식이 없다면 그건 기부를 빙자한 거래나 위선이기 쉽다. 그의 사퇴로 총리 자리를 몇 억 주고 ‘샀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매관매직이 삼정문란 시기의 탐관오리들의 문제인 줄만 알았다는 실망감을 줄 뻔했다. 강직하다는 세평을 얻던 이라서 더욱 그의 처신이 안타깝다. 그런 사람 제대로 지켜내 주는 세상이어야 하거늘. 이 참에 제대로 기부하는 운동하는 것도 좋겠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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