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가
조선 후기 문장가 심노숭(1762-1837)이 아내를 잃고 지은 누원(淚原)의 첫머리에 던진 질문이다. 눈에 있다면 물이 웅덩이에 고인 듯 모인 것인지, 마음에 있다면 피가 맥을 타고 돌듯 하는 것인지 고쳐 따졌다.
눈물로 가득한 봄날이다. 세월호에서 피붙이를 잃은 이들의 통곡과 피눈물이 한반도를 적시고 있다. 단원고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과 동영상을 소개하던 뉴스 앵커는 슬픔을 참아 내느라 잠시 진행을 멈출 정도다. 주말마다 추모집회와 촛불을 든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차디찬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 이름을 한 명씩 따라 외친다. 이름을 혀끝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또 눈물이 흐른다.
이 참사에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이 눈물을 쏟았다는 기사가 간간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악어의 눈물에 불과한지에 대한 공방도 SNS를 통해 뒤따랐다.
연기자 문성근은 서툰 배우일수록 눈물범벅인 얼굴을 카메라에 들이대는 실수를 종종 범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실제 삶에서 슬픔이 밀려들면 당황하고 민망하여 참으려 애쓰다가 누가 보기라도 할까 싶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기자들 앞에 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시선을 내리지도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정치인은 이미지가 중요하니 눈물 연기쯤은 효과를 고려하여 얼마든지 흘릴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진심 따윈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날아들었다.
심노숭은 눈물이 마음에서도 나오고 눈에서도 나온다고 했다. 구름을 눈, 땅을 마음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비와 같다는 것이다. 비는 구름과 땅을 통하는 기(氣)의 감응에 의해 내리되, 구름에도 속하지 않고 땅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심노숭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느꺼움이다. 상(喪)을 당해 참담한 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여러 해를 지나 흥겨운 악기들이 들어찬 자리에 머물 때, 업무를 보느라 서류가 책상에 가득할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릴 때, 잡기를 여유롭게 즐길 때, 그러니까 눈물과 전혀 무관한 그때에도 마음이 갑자기 북받친다는 것이다. 그 느꺼움의 순간, 심노숭은 죽은 아내가 곁에 왔음을 느낀다고 적었다.
존 버거의 소설집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죽은 자들과의 재회로 가득하다. 첫사랑 여학생, 스승,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노년에 접어든 1인칭 화자는 망자들과 대화하며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간다. 우리는 왜 망자들을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그 삶을 되새기고, 나아가 의미 있는 장소에서 소설적인 대화라도 나누려 노력할까. 존 버거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행위였죠. 그러던 것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면 전부 ‘퇴물’ 취급을 하는 세계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액(液)이든 즙(汁)이든 정치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물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책임을 통감한다는 그들에게 확인할 질문을 챙기기에도 빠듯하다. 언제 느꺼움이 찾아들었느냐고. 죽은 이들의 속삭임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산 자들에게 당부하였느냐고.
우리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기 위해서라도,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추모의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망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긴 대화를 나눠, 이미 공유한 것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공유할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느꺼움은 이 정치적 교신이 오가는 만남의 장소로 찾아들 것이다. 눈물이 따른다면 엉엉 내지르며 울어도 좋고 반가움이 크다면 활짝 웃어도 좋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합창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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