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숨어 좀체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 형체. 그래서 거대한 곤충 같다가 파충류 같기도 하고 멸종된 고대 육식 괴물이나 신화 속 미지의 존재 같을 때도 있다. 아가리가 열리면 칼날 같은 치아가 드러나고 그 안에 더 예리한 이빨을 지닌 뱀 같은 혀가 나타난다. 우주선 선체조차 녹이는 산성 체액과 금속성 피부, 가공할 공격력과 지능, 은신ㆍ생존 능력을 지닌 우주 최강 최악의 괴물. 영화 ‘에일리언(Alien)’의 주인공, 에일리언이다.
SF의 세계에 등장한 수많은 외계ㆍ이계 생명체들에 견주어 에일리언을 최강이라고 하는 건 물론 주관적이고 유치한 평가다. 하지만 1979년 에일리언이 처음 스크린에 데뷔한 이래 그 위협적 아우라를 능가한 괴물은, 적어도 내겐 없었다. 인류는, 괴물에 관한 한, 한 세대 전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영화 에일리언의 성공과 잇단 후속작들의 탄생도 시나리오나 컴퓨터그래픽 기술, 연출 능력에 앞서 에일리언의 캐릭터 자체에 크게 빚진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언젠가 자신의 영화를 “A급 방식으로 만들어진 C급 영화”라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절반만 정직한 평가다. ‘A급 방식’이란 한마디로 에일리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에일리언을 창조한 스위스의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 루돌프 기거(Hans Rudolf Giger)가 5월 12일 스위스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작고했다. 향년 74세.
SF 전문잡지 ‘sci-fi Invasion!’ 1998년 여름호는 기거와 스콧 영화팀이 에일리언을 창조할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들을 소개했다. 영화 시나리오는 60년대 중반에 이미 만들어졌지만 정작 마땅한 에일리언이 없어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다 스콧 감독의 차례가 됐고, 그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인 댄 오배넌이 변방의 크리처 디자이너 기거를 눈 여겨봤고, 에일리언 초안 3점을 1,000 달러에 주문했고, 정작 스콧은 기거의 76년 작품집 ‘네크로노미콘Ⅳ(NecronoiconⅣ)’의 괴물에 꽂혀 드디어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고소공포증이 있어 비행기 타기를 두려워하던 기거를 스콧이 직접 찾아가 설득한 뒤 영국 스텝턴 스튜디오로 오게 한 이야기….
당초 기거는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괴물을 창조할 생각이었으나 스콧은 ‘네크로노미콘Ⅳ’가 자신이 찾던 괴물이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세부적인 것들은 협의 과정에서 채워졌다.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입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던 중 혀에 이빨을 달자는 제안을 한 것은 스콧이었다. 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에서는 기거가 고집을 부렸다. 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스태프들의 생각에 기거는 “괴물이 어디를 바라보는지 우리(관객)가 모를 때 괴물은 훨씬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각 대신 미지의 감각으로 어둠을 장악하는 에일리언에서 기거가 포기한 것도 있다. ‘꿈틀거리는 뇌’다. 그는 투명한 두개골을 염두에 두었으나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중단, 대신 에일리언 특유의 길고 미끈한 뇌를 만들었다고 한다. 11개월간의 당시 작업 과정을 회상하며 스콧은 기거를 ‘진정 독창적인(true original) 천재’라고 B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시 작업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됐고, 나는 그의 통제된 스튜디오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이자 기괴하고 독창적인 작가였다. 그리고 정말 멋진 남자였다.”(2014.5.14).
H.R 기거는 1940년 2월 5일 스위스 동부의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쿠어(Chur)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별난 아이였던 듯하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 때 그는 그 트럭에 해골을 싣고 다녔다.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소장품이었다. 스위스 뉴스채널인 ‘SWI(swissinfo.ch)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8살 때 쿠어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와 석관을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내 생애 가장 강렬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2007.7.16). 스스로 옷을 골라 입게 되면서부터는 항상 검은색 옷만 입었고, 산책도 해가 진 뒤에나 나갔다고 한다. 12살 때 살바도르 달리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들을 처음 보곤 악몽 같은 공포에 매료됐고, 훗날 그 공포를 자신의 세대가 경험한 2차대전의 잔학상과 결합시키려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Telegraph, 2014.5.13) 91년 자서전 <HR 기거>(원제 <HR GIGER ARh+>)에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어두운 곳만 찾아 다녔고, 옷도 검은색이었다. 우리 집에서 제일 어두운 곳은 창 없는 방의 탁자 밑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이성에 호기심은 많았으나 이성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외모는 타고나지 못했고, 성격도 소심한 편이었던 듯하다. 대신 그에게는 또래의 장난기를 넘어서는 예술적 충동이 있었다. 자서전에는 유년 시절 슈토르헨 거리 17번지 집 어두운 복도를 ‘유령 열차’로 꾸며 소녀들을 유인했던 이야기가 장황하게 소개돼 있다. 테마파크의 ‘유령의 집’과 유사한 그의 ‘유령 열차’에는 스프링의 힘으로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 석고로 만든 해골과 괴물, 시체 모형들, 자전거 램프의 음산한 조명 등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입장료는 있었지만 예쁜 소녀들은 무료였다. 자서전에서, 초등학교 3학년 이후 <밀랍인형관>, <오페라의 유령>같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유령열차가 유치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보면 그의 저 장난은 10대 이전의 일이었던 듯하다. 예술가로서의 기거는 생애 내내 성과 죽음의 문제에 몰두했다.
그는 통념상 ‘좋은’ 학생은 아니었던 듯하다. 적어도 아버지의 기준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초등 6학년 때 가족이 스위스 로잔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유 중에는 그의 수학 낙제와 1년 유급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같은 수업을 반복해서 듣기 싫었고, 그건 아버지로서도 못마땅한 일이었다. 기거의 예술에의 경도도 아버지로선 마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보수적인 고향에서 예술가란 주정뱅이나 호색한, 게으름뱅이처럼 천대받는 단어였고, 그의 아버지는 예술을 말할 때마다 ‘돈이 안 되는 밥벌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성적 미달로 고교 졸업을 못하고 한 건축사무소에 견습생으로 취직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쩌면 아들이 건축설계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게 된 게 반가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드로잉페이퍼 여백에 캐릭터 ‘Atom-kinder(원자 아이들)’ 연작을 그려 언더그라운드 잡지 등에 발표하곤 하던 1959년 무렵의 아들은 못마땅했을 것이다.
군복무 후인 1962년 그는 취리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해 인테리어 디자인과 산업디자인 과정을 전공하고 66년 디자이너로 취직, 일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전업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 나간다. 그 시절 특기할 만한 것은 배우였던 룸메이트의 소개로 당시 배우 지망생이던 그의 뮤즈 리 토블러를 만난 일이다. 두 사람의 연애는 격정적이었고, 그 격정 속에서 후끈하고 오싹한 기거의 ‘리’연작들이 탄생한다. 리는 우울증 끝에 75년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 즈음 기거의 작품을 전시한 한 갤러리 주인은 “기거의 작품을 본 관객들이 유리창에 뱉은 침을 닦아내는 게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텔레그래프)
기거의 에일리언 창조의 역사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해 그는 단편 영화 ‘Swissmade 2069’의 ET(Extra-Terrestrial)를 의뢰 받아 만드는데 거기서 에일리언의 길쭉하고 위협적인 두개골 원형이 등장한다. 75년에는 알렉산드로 자도로프스키 감독과 계약을 맺고 프랭크 허버트의 ‘듄(Dune)’ 무대와 소품 디자인을 하지만 상업적인 이유로 빛을 보지는 못한다. 84년 곡절 끝에 영화는 개봉되지만 기거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대신 그가 창조한 ‘하코넨스(Harkonnens)’의 잔혹 세계는 SF마니아들 사이에서 멋진 평가를 얻고 있다.
그와 리들리 스콧을 이어준 네크로노미콘 시리즈는 크툴루 신화(인류 출현 이전의 외계 종족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상상의 신화)에 뿌리를 둔 작품들이다. ‘죽은 자의 가면’을 뜻하는 네크로노미콘이란 상징 안에서 그의 기괴하고 어두운 상상은 자유로운 캔버스를 만나고, 인체와 기계의 결합(바이오메카닉스)이라는 기거 특유의 표현력도 만개한다. 77년 출간된 화집 기거의 네크로노미콘은 “프리메이슨 내부자들 사이에 점점 더 인기를 끌었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에일리언의 수도사’로 환영받게 되었다.”(자서전 40쪽)
영화 ‘에일리언’으로 기거는 80년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타면서 일약 할리우드의 최고 크리처 디자이너로 각광 받지만 후속작인 제임스 캐머런의 <Aliens>(86), 데이비드 핀처의 <Alien3>(92) 제작 과정에는 소외되거나 제한적으로만 가담한다. 캐머런의 영화를 본 뒤 기거는 얼굴을 덮쳐 입으로 침투해서 기생 번식(face-hugger)하고 숙주의 가슴을 뚫고 나와 부화(chest- buster)하는 자신의 에일리언과 달리 여왕개미처럼 둥지를 틀고 알로 번식하는 2탄의 에일리언 컨셉이 흥미롭다고 평가하면서 “하지만 늑골형태의 두개골은 좀 천해 보인다”고 폄하했다. ‘sci-fi Invasions’는 기거의 그런 직설적인 표현들이 후속 작업의 계약 여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했다. 기거는 핀처 팀으로부터는 고양이과 짐승의 특징을 살린 에일리언 모델 제작 제안을 받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계약 역시 한 달 만에 무산된다. 핀처의 영화는 자막에조차 원안자 기거의 이름을 누락, 훗날 길고도 지루한 법정 다툼이 벌어진다. 소송에서 기거는 승리해 비디오 보급판에서나마 자막은 수정되지만, 그는 돈도 명예도 회복하지 못한 상처뿐인 승리였고 장 피에르 주네의 영화 ‘에일리언의 부활’(97)에서도 유사한 모욕을 당했다. 그의 생체공학적 괴물 이미지의 도용ㆍ모방 사례는 그 밖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기거의 에이전트인 레슬리 바라니는 “할리우드(20세기폭스)와의 첫 계약 당시 우리에겐 후속작 기대가 없었고, 당시는 후편이 보편적으로 제작되던 때가 아니었다. 또 우리는 영화에서 에일리언을 죽이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영화 및 예술 평론가인 르 폴 로블리는 거기에 대한 한 비평 제목을 ‘소외됨(Alienated)’라 달고, 할리우드로부터 소외 당한 기거의 예술에 대해 쓰기도 했다. 하지만 기거는 95년 영화 ‘스피시즈’와 2012년 에일리언의 전사(前史)를 그린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에는 행복하게 참여했다.
상처도 받았지만 할리우드에서의 활약은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선사했다. 대신 ‘진지한’ 예술계에서 그의 입지는 치명적으로 약화했다.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현대미술계는 기거의 작업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고, 한 때 고야나 피라네시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을 전시하곤 하던 갤러리들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취리히 파인아트뮤지엄 큐레이터인 토블라 베졸라는 스위스인포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뉴욕 모던아트박물관은 영화감독 팀버튼의 전시도 한다”는 말로 스위스 예술계의 편협성을 조롱했다.(2014.5.13)
물론 기거의 ‘외도’가 영화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그는 팝, 데스메탈 등 장르의 수많은 음반 자켓을 그렸고, 컴퓨터 게임 작업을 했고(다크 시드, 1995), 오토파이 폭주족 갱 집단인 ‘국제헬스엔젤’의 10주년 기념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다. 펑크그룹 ‘데드 케네디스’는 85년 그들의 앨범 ‘Frankenchrist’에 기거의 그림 ‘풍경##’을 삽입, 캘리포니아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풍경 ##’은 삽입 성교 중인 남근을 클로즈업해 여러 개로 복제해 ‘남근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작품인데, 86년 14살짜리 한 소녀가 11살 남동생에게 그 앨범을 선물했고, 부모가 앨범 속 포스터를 본 뒤 주 검찰청에 고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그룹은 앨범 표지에 경고문을 달아 법적 잡음을 무마하려 했으나 검찰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경고문 문구는 “앨범 안에서 충격적이고 구역질 나는 무언가를 보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가끔 그럴 때도 있지요”였다. 데드 케네디스는 결국 포스터를 삭제하는 대신 팬이 메일로 신청하면 따로 보내주는 식으로 물러섰고, 사건은 심리중지됐다.(롤링스톤, 2014.5.13)
주류 미술계의 푸대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98년 기거는 스위스 그뤼예르의 고성을 사들여 ‘HR기거 박물관’을 연다. 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신의 작품들을 되사 들였다. 말년의 그는 경제적으로 쪼들렸다고 한다.
기거는 미술인 미아 본자니고와 79년 결혼했다가 1년 반 만에 이혼하지만 생애 내내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로 지냈다. 2006년 그는 자신의 박물관 감독이던 카르멘과 재혼했고, 자녀는 없었다. 지난 해 그는 ‘SF 판타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기거는 잡지 ‘스타로그’와의 1979년 인터뷰에서 “만일 내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창조적인 사람일 것이다. … 아니면 미쳤거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처럼, 제대로 미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은 이들 중에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세계 수많은 에일리언의 팬들은 ”‘에일리언의 아버지가 떠났다”며 그의 부재를 애도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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