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갑자기 많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6ㆍ4 지방선거에 나선 후보들의 제발 자기 좀 뽑아달라는 아우성들이다. 세월호 그 끔찍한 사고 수습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세상은 또 계속 돌아가겠다고, 그래서 선거도 치러야겠다고 난리인가 보다. 온 세상이 비극으로 침잠해 있을 때 권력을 탐하며 어떻게든 한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선 현수막 속 위인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2014년 전세계는 유난히 선거 이슈로 달아올랐다. 연초부터 큼지막한 선거들이 줄을 이었다. 지난 4월 7일 시작한 인도 총선은 압권이었다. 거대한 땅덩이에 12억이 넘는 인구를 대상으로 한 세계 최대의 선거답게 투표하는 데만 한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22~25일 치러진 유럽의회 의원선거는 인도 총선 다음으로 큰 규모의 선거로, 28개국 3억8,000만명의 유권자에 뜻을 물었다. 투표 결과 극우정당이 두각을 나타냈고, 유럽에선 ‘정치적 지진’이 일어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예정에 없던 급조된 선거도 꽤나 많았다. 최근 나라 꼴이 우스워진 우크라이나에서도 갑작스런 선거를 여러 번 치렀다. 크림반도나 동부지역의 분리주의자들은 ‘인민의 자기 결정권’을 내세우며 분리독립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하지만 그 투표들은 온전치 못했다. 무장세력의 관할 아래 독립에 찬성한 주민들 위주로 치러졌고, 상당수 투표소에는 유권자 명부도 없었고, 기표내용이 뻔히 보이는 투명한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기도 했다. 그런 투표로 나온 결과를 가지고 그들은 독립을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 우크라이나는 조기 대선을 실시해 새 대통령을 뽑았다. 하지만 이 대선도 분리주의 세력 때문에 동부의 상당 지역에서 투표가 원활하지 못했다. 특히 크림에선 아예 선거를 치를 생각도 못했고, 크림에서의 선거 포기는 곧 크림이 러시아 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태국에선 군부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2001년 선거에서 탁신 친나왓이 친서민 카드를 앞세워 정권을 잡은 뒤 기득권층은 혼돈에 빠졌다. 탁신파를 지지하는 서민들의 수가 훨씬 많으니 민주적 선거에서 그들을 이길 방도가 없어진 것이다. 2006년 군부와 민주당이 반탁신으로 연대해 탁신을 쫓아냈지만 이어진 선거에서 또 지고 말았다.
결국 반탁신 기득권층은 이번에 헌법재판소와 군부를 이용해 잉락 친나왓마저 쫓아냈다. 물론 포퓰리즘과 부패로 점철된 탁신 일가의 정치 또한 올바른 민주주의라 말할 수 없지만, 선거의 결과 자체를 부정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법쿠데타적 결정이나 군부의 쿠데타를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 대선을 치른 이집트의 경우, 국방장관 출신 압델 파타 엘시시의 당선이 확실함에도 공식 선거기간인 이틀 동안의 투표율이 35%로 저조하다는 이유로 고무줄 늘리듯 투표일이 하루 더 연장됐다. 선거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원하는 결과를 위해 선거 자체를 조작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거를 통해 국가들은 제 수준을 드러내고 있고, 우스꽝스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는 망가지고 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당이 큰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유럽 언론은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내 눈엔 43%에 불과한 투표율이 먼저 들어왔다. 극우 준동을 막지 못한 건 투표에 무관심한 귀차니스트들의 방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세상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우리 동네의 선거판을 다시 바라본다. 멀쩡한 수백 명의 생명이 바닷속에 가라앉는 것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못난 나라이지만, 선거판에 나온 이들 대부분 권력 욕에만 목을 매고 있지만, 그 비루한 선거판을 그냥 못 본 척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포기한 그 한 표가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주지 아닌 곳에서도 투표할 수 있는 사전선거가 새로 도입됐다는데, 주말 바람 쐬러 나가 사는 곳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투표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 멀리서 바라보면 개중 괜찮게 느껴지는 후보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성원 국제부 차장대우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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