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매봉~도곡역 중간서 70대 남성이 방화
역무원·승객이 재빨리 진화
용두동 홈플러스 주차장 차 불타 대피 소동
종로 빌딩 지하서도 차 화재
28일 70대 남성이 수백 명을 타고 있던 지하철 객차 안에 불을 질렀다. 자칫 11년 전 대구 지하철 참사의 악몽이 되풀이될 뻔한 상황이었으나, 역무원과 승객들이 재빨리 불길을 잡아 인명 피해는 없었다. 전남 장성군 효사랑요양병원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 21명이 숨진 이날 서울 곳곳에서도 화재가 잇따라 시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조모(71)씨는 이날 오전 10시 51분쯤 서울 지하철 3호선 오금행 열차가 매봉역과 도곡역 중간 지점을 지날 때 시너에 불을 붙였다. 네 번째 객차 뒷부분 노약자석에 앉았던 조씨는 1리터짜리 시너병 11개를 담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5병의 마개를 열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조씨는 두 차례나 더 불을 붙였으나 실패하자 도곡역 출구로 도망갔다.
역무원ㆍ승객 대처로 참사 모면
조씨가 불을 낸 열차에는 승객 370여명이 타고 있어 역무원과 승객들의 침착한 대처가 아니었다면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조씨와 같은 객차에 탔던 매봉역 역무원 권순중(46)씨는 승객들에게 신고를 부탁한 뒤 객차 안에 있던 소화기로 불을 끄기 시작했다. 남성 승객 두 명도 소화기를 들어 권씨를 도왔고, 한 승객은 비상벨을 눌렀다. 김모(57ㆍ여)씨는 옆 객실에서 소화기를 들고 와 불길을 잡는 이들에게 건넸다. 이들의 대처로 불은 인명 피해 없이 8분 만에 꺼졌고, 지하철 운행은 1시간 만에 재개됐다.
방화범 “억울함 알리려 불 질렀다”
방화 뒤 역사를 빠져 나온 조씨는 구급대원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구급대원들은 인근 화상전문병원으로 이송 중 조씨가 “기자를 불러달라”고 떼쓰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했고, 조씨는 병원에서 바로 체포됐다.
조사 결과 조씨는 방화할 곳을 사전 답사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에 살고 있는 그는 지난 22일 버스를 타고 상경해 3호선 삼송역을 살펴본 뒤 광주로 갔다가 27일 시너를 실은 차량을 몰고 올라 와 삼송역 인근 모텔에 투숙했다. 그는 이날 오전 10시쯤 3호선 원당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했다.
조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지하철 2호선 추돌 사고를 보니 내 억울함을 언론에 알리려면 지하철에서 분신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조씨는 2000년 자신이 운영하던 업소 정화조가 터져 손해를 입고 건물주를 상대로 10여년간 소송을 해 승소했지만 기대했던 5억원에 못 미치는 수천만원만 배상 받았다고 주장했다. 수서경찰서는 조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잇따른 화재로 시민들 불안감 가중
이날 오전 9시 6분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홈플러스에서는 5층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에 에어컨 과열로 불이 나 차주인 권모(50)씨가 연기를 마셔 병원에 이송되고 매장에 있던 시민 50여명이 대피했다. 1시간 뒤에는 종로구 서린빌딩 지하 3층 주차장에 있던 차량에서 불이 나 150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경비원 등이 소화기로 진화하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안전 문제가 부각된 가운데 연일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르자 시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회사원 장진서(30)씨는 “작은 화재도 (정부나 관리업체 등의) 잘못된 대처로 피해가 커질까 봐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대학생 정자영(21ㆍ여)씨는 “지하철에서 이상한 차림을 한 사람만 봐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피한다. 심각한 불안감에 최근에는 (안전 관련) 정부 정책도 눈 여겨 본다”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