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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상이 예술이 된다 침묵의 음악이든 수런거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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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상이 예술이 된다 침묵의 음악이든 수런거림이든

입력
2014.05.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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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클럽1563에 설치된 존 케이지의 ‘에세이 두루 쓰기-시민 불복종 의무에 대하여’. 의자는 빛과 소리로 이뤄진 이 작품의 일부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아트클럽1563에 설치된 존 케이지의 ‘에세이 두루 쓰기-시민 불복종 의무에 대하여’. 의자는 빛과 소리로 이뤄진 이 작품의 일부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4분 33초'로 백남준 감화시킨 작곡가 존 케이지 설치작품 '에세이 두루 스기' 국내 첫전시

소로 에세이 메조스틱 원리 낭독 관객 반응이 작품 완성해

한 ㆍ獨 작가 6명 참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질문 던져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1932~2008)가 1952년 발표한 ‘4분 33초’는 침묵의 음악이다.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 앉아 있다가 퇴장한다. 1악장 33초, 2악장 2분 40초, 3악장 1분 20초로 시작과 끝이 있고 악보도 있지만 소리는 없다. 아니 있다. 어리둥절해하는 관객들의 수런거림이나 그 시간 동안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다.

음악과 소음, 소리와 침묵, 시간과 상황, 예술과 일상, 규칙과 우연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오랜 관습을 박살낸 이 작품은 음악뿐 아니라 현대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아방가르드로 치닫게 한 것도 이 곡에서 받은 충격이다.

서울 서초동의 비영리 전시공간 아트클럽 1563에서 열리고 있는 ‘침묵은 움직임이다’는 존 케이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답변이다.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존 케이지의 설치작품 ‘에세이 두루 쓰기-시민 불복종 의무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한국 작가 3명과 독일 작가 3명이 참여한 국제 교류 전시다. 사진, 영상, 설치 등의 작품 10여점이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케이지의 작품은 전시장 한복판에 있다. 빛과 소리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네 개의 흰 벽으로 에워싼 공간 안에 덩그러니 놓인 6개의 극히 평범한 의자뿐이다. 천장의 흔해빠진 형광등도 작품의 일부이긴 하다.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보이지 않게 설치한 36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이 소리는 19세기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에세이 ‘시민 불복종 의무에 대하여’를 메조스틱 원리(각 행의 중간에 있는 글자를 하나씩 선택해 수직으로 읽는 방식)로 열여덟 번 베껴서 낭독한 것이다. 18개의 텍스트를 똑 같은 길이 똑 같은 음높이로 읽은 18개의 녹음과 각각 다른 음높이로 낭독한 18개의 녹음이 무작위로 뒤섞여 나온다. 소로의 텍스트를 질서도, 의미도 없는 소리덩어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시민 불복종의 예술적 실천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셈이다.

메조스틱 원리에 따른 이런 작업을 케이지는 ‘두루 쓰기’라고 부른다. ‘두루 쓰기’ 연작의 하나인 이 작품은 독일 브레멘의 쿤스트할레에 영구 설치돼 있다. 다른 데서도 소개할 수 있도록 케이지가 만든 2개의 소규모 에디션 중 하나를 선보이고 있다. 관객의 반응과 움직임이 작품을 완성한다. 의자를 쓰러뜨리든, 앉아서 졸든, 이게 뭐야 하고 투덜거리든 맘대로다. 한참 듣고 있으면 명상에 빠질 수도 있다.

다른 여섯 작가들의 작품은 주제와 접근 방식에서 케이지와 통한다. 몇몇은 전시 개막식에 참석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한 퍼포먼스 비디오 ‘침묵은 움직임이다’의 작가 천경우는 “나에게 케이지는 일상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들이 예술의 주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진을 주된 매체로 작업해온 그는 이 작품에서 시간과 우연을 실험했다. 체육관에 모인 16명의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7분을 세다가 시간이 다 됐다 싶으면 다른 아이의 의자로 가서 앉는다. 그 자리가 비어 있지 않으면 옆에서 기다렸다 앉는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서로 달라 일어나는 충돌과 거기에 끼어드는 우연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런던에서 작업하는 권순학이 출품한 ‘유니언 갤러리의 역사’도 시간에 대한 탐구다. 아무 형체 없이 허연 사진 여러 장을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했다. 자세히 보면 낙서와 얼룩, 못자국이 있지만 알아차리기 힘든 이 사진들은 건물의 벽을 찍은 것이다. 공간의 역사를 벽면의 흔적으로 기록했다. 독일 작가 크리스티안 하케는 신문으로 국을 끓였다. 종이죽이 되어버린 것을 얇게 펴서 액자 안에 넣은 이 작품(‘디 자이트’)을 그는 “다시 창조한 신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사물을 통해 관계와 공명을 다루는 호르스트 뮐러의 사진과 설치작품, 종이를 쓰다듬거나 그물에 걸린 햇빛을 찍어 시간을 채집한 마리케 하인츠혹의 영상작업도 ‘다르게 생각하기’를 권한다.

전시는 7월 30일까지 한다. 백남준 회고전을 최초로 기획한 독일의 세계적 전시기획자 볼프 헤르조겐라트, 런던과 서울을 거점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전시기획사 숨의 이지윤 큐레이터가 공동으로 기획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권순욱의 사진작업 '유니언 갤러리의 역사'. 건물 벽의 흔적으로 공간의 역사를 기록했다. 300x300cm. 사진 제공 아트클럽1563.
권순욱의 사진작업 '유니언 갤러리의 역사'. 건물 벽의 흔적으로 공간의 역사를 기록했다. 300x300cm. 사진 제공 아트클럽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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